임대홍 창업회장은 미원을 개발해 현재 대상그룹의 근본을 세운 '실험가형' 기업가다. 사진은 2016년 4월5일 별세한 고(故) 임대홍 창업회장. /사진=대상
임대홍 창업회장은 미원을 개발해 현재 대상그룹의 근본을 세운 '실험가형' 기업가다. 사진은 2016년 4월5일 별세한 고(故) 임대홍 창업회장. /사진=대상


2024년 창립 68주년을 맞이한 대상은 순수 국내자본과 기술로 설립돼 세계 일류의 발효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대표적인 종합식품기업이다. '대상'이라는 기업은 다소 낯설 수 있지만 '미원 회사'라고 하면 누구나 알아듣는다. 대상은 최초의 국산 조미료 미원과 국민 브랜드 청정원 등을 보유하고 있다.


대상은 고(故) 임대홍 창업회장이 세운 기업이다. 대상을 창립하기 전 무역업을 전개하던 임 회장은 일본과 홍콩을 자주 오갔다. 이 과정에서 일본 상품들이 한국시장에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데에 대한 반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경쟁 상대 없이 우리나라 식탁을 점령하고 있던 일제 조미료 '아지노모토'를 보고 국산 조미료를 직접 만들어야겠다는 열망을 품게 됐다.

임 회장은 수소문 끝에 일본 조미료 아지노모토의 성분이 아미노산의 일종인 글루탐산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국산 조미료 제조 가능성을 확신했다. 국산 조미료를 직접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1955년 조미료 제조기술을 익히기 위해 일본행을 결심했다.



국산 조미료 제조 열망에 일본행


1960년대 미원 제품. /사진=대상
1960년대 미원 제품. /사진=대상


일본에서 1년 가까이 고군분투한 끝에 수천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마침내 MSG 제조공정의 기초를 터득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임 회장은 일본에서 익힌 조미료 제조기술의 기초를 토대로 국내에서 생산하기 위한 제조공법 개발에 몰두했다. 임 회장은 개발할 때는 한 번 실험실에 들어가면 꼬박 100일 넘게 실험실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끝없는 실험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새로운 조미료 제조공법에 성공했다.

1956년 1월31일, 임 회장은 부산 동대신동에 조그만 조미료 공장을 세우고 국내 최초의 조미료 회사인 '동아화성공업 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순수 국내자본과 우리 기술로 만든 최초의 국산 조미료 '미원'(味元)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으며 미원그룹(현 대상그룹)의 시작이었다.


이곳에서 순수 국내 기술과 자본으로 만든 최초의 국산 조미료 미원이 탄생했다. 미원이 조미료 점유율 50%를 넘어서는 국민 조미료로 등극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원은 1967년 국내 발효식품 최초로 KS인증마크를 획득했다. 1970년에는 네덜란드에서 열린 '제 9회 세계식품콘테스트' 통조림 부문에서 1등으로 선정돼 품질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1970년대 초반에는 인도네이사에 진출, 주력사인 미원인도네시아를 비롯해 6개 계열사를 거느린 '제2의 미원그룹'으로 성장했다. 이어 베트남과 중국, 그리고 미국과 유럽에까지 미원을 수출하며 해외 시장을 공략해 나갔다.


실험가적 면모 짙은 검소한 경영인


1956년 대상그룹 모태인 동아화성공업주식회사 창립 당시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회장(오른쪽). /사진=대상
1956년 대상그룹 모태인 동아화성공업주식회사 창립 당시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회장(오른쪽). /사진=대상


임 회장은 창업 초기부터 경영자이기보다는 실험가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미원 제조기술을 익히는 과정도 그랬지만 제조 설비 역시 임 회장이 직접 실험을 거듭해 개발했다. 처음 동아화성공업㈜ 창업 당시는 6∙25 전쟁을 치른 직후라 모든 물자가 부족했고 현대적 생산 설비를 갖춘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글루타민산 제조 과정 중 염산을 분해할 때 생기는 설비의 산화부식을 막을 수 있는 설비를 구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임 회장이 생각해낸 것은 옹기였다. 당시 공장을 가득 메운 옹기솥으로 미원을 생산하다가 이어서 농축부를 목조로 교체했다. 이후 한동안 목제농축부를 사용해 왔지만 더욱 견고한 농축조 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한 임 회장은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끝에 '석부'(돌솥)를 생각해냈다.

임 회장은 경제적이면서 완벽한 내구성을 갖춘 동시에 대량 생산이 가능한 석부를 개발하기 위해 두 달간 직접 전국 각지의 유명한 돌은 전부 수집해 철분함량과 염산함량 조사 등을 실시해 가장 석질이 우수한 돌을 찾았다. 그 돌을 가지고 4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수십명의 석공과 함께 깎고 밀고 다듬은 끝에 드디어 미원을 대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석부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기업가의 이미지와는 달리 대외 활동과 사교 활동을 즐기지 않은 것도 이러한 실험가적인 성향과 일맥상통한다. 회장으로 재직 당시 비서실에서도 회장실 문을 열어 보고서야 퇴근을 인지했을 정도로 항상 조용히 자신의 공간에서 실험과 연구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이러한 성향 탓에 세상에 얼굴과 행적을 알리지 않고 숨어 산 미국의 대부호 하워드 휴즈에 빗대어 '한국의 하워드 휴즈'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의 검소함 또한 재계에서 유명하다. 현역 시절 지방 출장을 가도 숙박료 5만원이 넘는 숙소에는 묵지 않았으며 승용차보다는 전철을 더 많이 애용했다. 평생 통틀어 한 번에 양복 세 벌과 구두 두 켤레 이상을 소유했던 적이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2016년 4월5일 향년 96세로 별세한 임 회장은 지나치리만큼 검소했지만 1971년 사재 10억원을 들여 장학재단을 만드는 등 재산의 사회 환원과 사회공헌 활동에 열의를 보였다. 소외된 이웃을 찾아 도우며 학문 발전과 문화 예술의 창달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1971년 출범한 재단법인 대상문화재단은 현재까지 48년간 총 1만6200여명의 학생에게 약 190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