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리포트] ③벤처 1세대가 일군 IT 강국… 꺼져가는 혁신의 불씨
[변곡점 맞은 韓 벤처 1세대] 투자 위축, 규제로 벤처·스타트업 생태계 위기 직면
김성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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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2 | 14: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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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 IT 산업은 90년대 말 이해진, 김범수, 장병규, 김택진 등 IT 벤처 1세대의 끊임없는 도전으로 반석 위에 올랐다. 남들과 다른 사고와 접근으로 IMF에 허덕이던 한국의 새로운 성장 방정식을 정립했다. 성공 신화도 잠시, 타성에 젖은 경영과 혁신 없이 표류하는 리더십이 도마 위에 오르며 위기를 맞았다. 여러 부침을 겪으며 숨을 고르던 이들은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과 변화하는 산업 환경 속에서 또 다른 위기에 직면했다. 과거 한국 IT 산업을 개척했던 이들이 다시 한번 혁신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민간 차원의 적극적인 협력과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평가다. 정부와 기업이 긴밀히 협력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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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는 벤처 기업과 스타트업의 혁신을 통해 도약해왔다. 네이버 이해진, 카카오 김범수, 엔씨소프트 김택진, 크래프톤 장병규 등 '벤처 1세대' 주역들은 1990년대 후반 벤처 붐을 주도하며 한국 정보기술(IT) 산업의 초석을 다졌다. 이들은 기술 기반 창업을 통해 경제 성장의 핵심 동력을 만들어냈고 글로벌 무대에서도 주목받는 기업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최근 투자 위축과 인공지능(AI)·첨단 기술 인재의 해외 유출이 가속화되면서 한국의 벤처 생태계는 위기에 직면했다. 유망 스타트업이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 기업) 기업으로 성장하기 전에 해외로 본사를 이전하는 사례가 늘면서 한국 경제가 글로벌 혁신 경쟁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경고음이 커진다.
12일 통계청이 발표한 창업 기업 수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11월까지 창업한 기업 수는 109만2176개로 집계됐다. 12월의 통계가 아직 포함되지 않았으나 당시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 등 불확실성이 높았던 점을 고려하면 창업이 활발하게 이뤄졌을 가능성은 낮다. 지난해 창업 기업 수는 2016년(119만117개) 이후 최저를 기록한 것으로 관측된다.
창업 이후 본사를 해외로 이전하는 등 국내 스타트업의 해외 이탈도 증가하는 추세다. 벤처투자 정보업체 더브이씨(TheVC)에 따르면 해외로 진출한 한국 스타트업은 2014년 32곳에서 2023년 186곳으로 10년 만에 6배 증가했다.
이는 국내 창업 환경이 글로벌 시장에 비해 점점 더 경쟁력을 잃고 있음을 방증한다. 벤처·스타트업 업계에서는 ▲고질적인 규제 ▲투자 부진 ▲인재 유출을 주요 원인으로 꼽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 차관을 역임한 조주현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원장은 "AI 기술의 급속 성장으로 각국의 기술 격차가 커지면서 보다 글로벌화되고 기술 집약화된 벤처·스타트업 생태계에서 한국 기업이 전 세계에서 통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기 어려워졌다"며 "현재는 충분한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인데 규제를 과감히 낮추고 투자를 늘려야만 한다"고 설명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최근 창업 7년 미만 스타트업 300곳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 기업의 63.4%가 '한국에서 규제로 인해 사업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답했다. 이들 가운데 37.7%는 한국의 스타트업 관련 규제가 ▲미국 ▲중국 ▲일본 등 주요 경쟁국보다 더 강하다고 평가했다.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해외에서는 합법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규제에 가로막혀 사업화조차 어려운 사례도 많다. 미국에서는 원격진료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헬스테크(HealthTech) 사업이 급성장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규제 문제로 사업이 불가능하다. 법률 서비스 분야도 마찬가지다. AI 기반 법률 상담 서비스는 미국과 유럽에서 활발히 운영되나 한국에서는 변호사법 위반 소지가 있어 사업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글로벌 벤처 국내 투자액 9896억원→2318억원으로 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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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투자도 위축돼 '돈맥경화'도 심화했다. 한국의 벤처 투자액은 2021년 15조9371억원에서 2023년 10조9133억원으로 31.4% 감소했다. 문제는 글로벌 벤처 투자 유치액이 급감한 것이다. 2021년 1조원에 육박하던 글로벌 벤처 국내 투자액은 2023년 2318억원으로 2년 만에 4분의1 수준으로 줄었다. 이는 한국 벤처·스타트업의 경쟁력 약화로 투자 매력도가 점차 감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AI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한국 벤처·스타트업이 'AI 슈퍼사이클'(초호황기)에 올라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로 지적된다. 현재 글로벌 벤처캐피탈(VC) 자금은 AI 산업에 집중되고 있다. 실제로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전 세계 73개국을 대상으로 AI 기술 성숙도와 잠재력을 평가한 'AI 성숙도 매트릭스' 보고서에서 'AI 선구자'(AI pioneers)로 선정된 싱가포르와 영국은 2023년 기준 벤처 투자액의 외국 자본 비중이 84%와 74%로 집계됐다. 반면 한국의 외국 자본 비중은 2.1%에 불과했다.
올해는 투자 한파가 심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으로 인한 경제적 불확실성 확대와 고금리 지속, 한국 내 정치적 불안정성 등이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AI 강국 도약'을 목표로 지난해 출범한 대통령 직속의 '국가 인공지능위원회'가 탄핵 여파로 난항을 겪고 있어 글로벌 벤처 투자 자금의 한국 유입이 더욱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경쟁력의 근간이 되는 고급 인재들도 한국을 등지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이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능력 있는 인재를 적극 끌어들이고 있어서다. 한국은 현재 'AI 인재 유출국'으로 분류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한국의 AI 기술 인력 유출입 지수는 -0.3으로 나타났다. OECD 산하 AI 정책 관측소가 집계하는 이 지수는 AI 기술 인력 1만 명당 유출입 수를 기반으로 계산되며 값이 0보다 작으면 인력이 유출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인재 유출 문제는 향후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AI 분야가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 통상연구원에 따르면 2027년까지 국내 AI 인력이 1만2800명 부족할 것으로 전망된다. 김명주 AI안전연구소장은 "국내 AI 전공 학생들은 졸업 후 선택할 수 있는 기업이 많지 않고 국내에서는 단기적인 성과 위주의 연구가 많아 인재들이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부족하다"며 "연구 환경과 처우가 훨씬 좋은 해외 기업들이 적극 인재를 유치하고 있어 결국 많은 인재들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투자 위축과 인재 유출 등으로 벤처·스타트업의 성장 사다리가 흔들리고 있다. 벤처·스타트업은 미래 경제를 책임질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아 왔지만 현재와 같은 환경이 지속된다면 한국의 글로벌 경쟁력은 점점 약화될 수밖에 없다. 중소벤처기업부와 벤처기업협회가 발표한 '벤처기업 정밀실태조사'에 따르면 벤처기업의 총매출은 재계 3위 수준이며 이들이 창출한 고용 인력은 국내 4대 그룹(삼성·SK·현대차·LG)을 합친 것보다 많다.
김광석 한국경제산업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한국 경제가 역동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혁신의 산물인 스타트업이 활성화되고 그 스타트업이 유니콘 기업으로 또 대기업으로 성장하면서 한국 경제의 산업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며 "지금 한국 IT 산업을 이끄는 기업의 출발도 벤처·스타트업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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