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현대중공업의 제안한 한국형 차기구축함 조감도(KDDX). /사진=HD현대중공업
HD현대중공업의 제안한 한국형 차기구축함 조감도(KDDX). /사진=HD현대중공업


서기 9년, 로마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겪었다. 당시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 정복을 위해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지만 명확한 전략을 세우지 못한 채 결정을 미뤘다. 지시가 모호하자 로마군은 방어와 진격 사이에서 갈팡질팡했고 그 빈틈을 놓치지 않은 게르만족이 기습을 감행했다. 방어진조차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로마군은 사흘간 포위당해 무자비한 공격을 받았다. 3만5000명의 병력은 몰살당했고 포로로 잡힌 이들도 끝내 살해됐다. 이 비극은 결단력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 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한국형 차기구축함(KDDX) 사업이 그 전철을 밟고 있다. 방위사업청이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사이에서 최선의 선택을 기다리며 결정을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5일 방사청은 정례회의에서 오는 27일 예정된 방위사업기획 관리분과위원회에서 KDDX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 관련 논의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당초 방사청은 이달 17일 사업 방식을 확정할 계획이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이례적으로 27일 추가 논의를 이어가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수의계약, 경쟁입찰, 공동개발 중 사업 방식이 결정될 전망이었으나 논의 자체가 무산됐다.


결과를 기다리던 방산업계에선 사업이 또 미뤄졌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이번 분과위 논의 결과에 따라 수주 기업을 가늠할 수 있기에 수년째 지속되는 갈등에 마침표가 찍힐 것이란 기대가 컸다. 방사청이 관례대로 수의계약을 진행한다면 기본설계를 진행한 HD현대중공업이, 경쟁입찰에 나선다면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경쟁한다. 경쟁입찰에 나설 경우 보안감점을 적용받는 HD현대중공업이 불리하다.

하염없이 방사청의 결정을 기다리는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는 로마군과 비슷한 처지다. 이들은 방사청의 결정에 따라 다음 사업 계획을 논의하고 구체화할 수 있는데 KDDX 기본설계가 끝난 지 1년 4개월이 지난 지금도 상세설계와 초도함 건조에 대해선 정해진 바가 없다.


사업이 미뤄지는 사이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의 갈등도 깊어졌다. 두 회사는 지난해 고소·고발전을 벌이며 감정의 골을 키웠다. 결국 양쪽 모두 지난해 11월 10조원 규모의 호주 호위함 입찰 과정에서 동반 탈락했다.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코리아 원팀'을 구성하지 않고 각각 사업에 뛰어들어 경쟁국에 밀리고 말았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비판이 커지자 양측은 마지못해 고소·고발을 취하하며 화해하는 모양새를 보였지만 근본적인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 모든 혼란의 근본 원인은 방사청에 있다. 왕정홍 전 방사청장이 수사받는 동안 KDDX 사업은 사실상 멈춰섰고 방사청은 문제의 책임을 양사 갈등 탓으로 돌리고 있다. 양용모 해군참모총장은 지난해 양사에 서한을 보내 "적기 전력화는 국가 안보와 번영을 위해 필수적"이라며 "핵심 전력이 제때 확보될 수 있도록 관심과 노력을 당부드린다"고 강조했다. 양측 갈등으로 인해 KDDX 사업이 지연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더 이상 결정을 미룰 시간은 없다. KDDX 선도함은 2030년 10월 투입될 예정이며 이를 위해서는 늦어도 2029년까지 함정이 인도돼야 한다. 건조 기간을 고려하면 상반기 내에 선도함 건조 업체를 선정해야 전력화 차질을 최소화할 수 있다.

완벽한 결정을 기다리다 기회를 놓칠 수 있다. 최고의 선택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우유부단한 결정이 초래한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의 비극이 2025년 대한민국에서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방사청이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최유빈 머니S 산업 기자. /그래픽=김은옥 기자
최유빈 머니S 산업 기자. /그래픽=김은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