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태의 읽는 인간] ①이디스 워튼과 댄 히스의 선택 : 염색은 업스트림이다
김영태 아케이드 프로젝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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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에 서너번쯤 머리카락을 염색한다. 새치가 절반쯤 올라오면서부터다. 미용실에 가 검은색과 흰색을 섞은 회색, 애쉬그레이를 고른다. 이 색깔이 나오려면 머리카락에서 색소를 제거하는 탈색 과정을 두차례 거쳐야 한다. 각각의 과정은 숙성의 시간을 포함하고 있어 서너시간은 족히 걸린다. 공을 들여 염색을 해도 오래 가지 않는데, 열흘쯤 지나면 애쉬그레이에서 카키그레이로 변한다. 그 뒤 또 열흘 후엔 옐로우그레이로 변하는데, 늦가을 이른 저녁 시간의 들판 같은 색깔이다. 머리를 자주 감으면 이 과정이 빨리 지나가고, 덜 감으면 천천히 간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출연한 영화 중 '순수의 시대'(The Age of Innocence)라는 작품이 있다. 마틴 스코세이지가 감독이었고, 루이스와 미셸 파이퍼, 위노나 라이더 등이 출연했다. 1993년작. 원전은 미국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여성작가 이디스 워튼의 동명의 장편소설이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분했던 아처 뉴랜드의 삶은 계산된 선택으로 만들어졌다. 사회적 지위, 가문, 심지어 도덕성까지도. 하지만 그의 속마음-사랑이라는 이름의-은 충분히 계산되지도, 선택되지도 못했다. (영화의 마지막은 쉰 일곱이 된 아처가 젊은 날 선택하지 않았던 사랑을 찾아가지만 또다시 선택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장면이다. 그의 백발이 모자 아래에서 빛난다.)
아처는 그래왔다.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은 내려놓았고, '지금은 최선인 선택'을 붙잡았다. 그는 모범 시민이 되었고, 가문의 명예를 지켰다. 성공적인 삶이라는 평판을 보상으로 받았다. 그리고 함께 하지 못한 세월에 대한, 깊은 후회를 남겼다. (돌아섬 또한 사랑의 표현일지도 모를 일이다만.)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보는 방법도 있다. 경영전문가 댄 히스의 '업스트림'(Upstream)도 그중 하나겠다.
우리는 흔히 문제가 발생한 뒤에야 그것을 해결한다. 아이가 물에 빠지면 구한다. 두 번째 아이도, 세 번째 아이도. 그런데 누군가는 물가를 거슬러 달려가기 시작한다.
"어디 가?"
"상류에 가서 도대체 누가 아이들을 물에 빠뜨리는지 보러."
문제가 발생한 뒤에 대응하는 것, 다운스트림만으론 부족하다. 눈앞의 문제만 처리하다 보면, 구명조끼는 될 수 있지만, 구조선은 되지 못한다. 원인을 찾아 없애야 한다. 이게 업스트림이다. 댄 히스는 책에서 업스트림에 성공한 다양한 사례를 소개한다. 어렵지만 해보라는, 보상이 꽤 크다는 주장과 함께.
업스트림 접근법은 품이 많이 든다. 알아주지 않을 때도 많다. 홍보(PR)와 대관(GR) 업무 총괄 시절, 조직과 예산을 유지(확대)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빈 카운터(Bean Counter) 재무책임자(CFO)를 만나면 얼마나 좀스럽게 논쟁해야 했는지. 평화의 시기는, 아무 일도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 일이 없게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아처가 업스트림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의 계산 속에 원인을 포함시켜 놓고, 그 원인이 시간에 따라 어떤 작은 변화들을 만들고,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를 미리 생각해봤다면 어땠을까. 예컨대 당장의 결혼으로 얻을 수 있는 지위 가문 도덕성 같은 것들도, 추후 노력으로 가질 수 있는 것임을 사전에 알았다면 어땠을까. 달라졌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아처의 선택이 실패한 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후회는 줄어들지 않았을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계산된 선택이나 계획이 아니라, 넓게 오래 볼 수 있는, 기다림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시야(視野)가 아닐까 싶다. 눈앞의 현상이 아니라 그 원인을 찾으려는 행동, 이미 지나간 결정이 남긴 무늬까지 되짚으려는 겸손, 애초에 누가, 언제, 무엇을 놓쳤는지를 기꺼이 질문하는 자세 같은 것들 말이다. 다만 그런 삶은 느리고, 비효율적이라서 종종 앞서가는 이들에게 조롱당할 수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믿는다, 시야의 힘을. 계획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고 태도라는 것을.
염색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할까 한다. 다시 말하지만, 애쉬그레이로 염색하려면 탈색 과정을 거쳐야 한다. 머리카락에 뿌리 깊게 박힌 색소를 다스리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염색의 업스트림이다.
김영태
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출연한 영화 중 '순수의 시대'(The Age of Innocence)라는 작품이 있다. 마틴 스코세이지가 감독이었고, 루이스와 미셸 파이퍼, 위노나 라이더 등이 출연했다. 1993년작. 원전은 미국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여성작가 이디스 워튼의 동명의 장편소설이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분했던 아처 뉴랜드의 삶은 계산된 선택으로 만들어졌다. 사회적 지위, 가문, 심지어 도덕성까지도. 하지만 그의 속마음-사랑이라는 이름의-은 충분히 계산되지도, 선택되지도 못했다. (영화의 마지막은 쉰 일곱이 된 아처가 젊은 날 선택하지 않았던 사랑을 찾아가지만 또다시 선택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장면이다. 그의 백발이 모자 아래에서 빛난다.)
아처는 그래왔다.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은 내려놓았고, '지금은 최선인 선택'을 붙잡았다. 그는 모범 시민이 되었고, 가문의 명예를 지켰다. 성공적인 삶이라는 평판을 보상으로 받았다. 그리고 함께 하지 못한 세월에 대한, 깊은 후회를 남겼다. (돌아섬 또한 사랑의 표현일지도 모를 일이다만.)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보는 방법도 있다. 경영전문가 댄 히스의 '업스트림'(Upstream)도 그중 하나겠다.
우리는 흔히 문제가 발생한 뒤에야 그것을 해결한다. 아이가 물에 빠지면 구한다. 두 번째 아이도, 세 번째 아이도. 그런데 누군가는 물가를 거슬러 달려가기 시작한다.
"어디 가?"
"상류에 가서 도대체 누가 아이들을 물에 빠뜨리는지 보러."
문제가 발생한 뒤에 대응하는 것, 다운스트림만으론 부족하다. 눈앞의 문제만 처리하다 보면, 구명조끼는 될 수 있지만, 구조선은 되지 못한다. 원인을 찾아 없애야 한다. 이게 업스트림이다. 댄 히스는 책에서 업스트림에 성공한 다양한 사례를 소개한다. 어렵지만 해보라는, 보상이 꽤 크다는 주장과 함께.
업스트림 접근법은 품이 많이 든다. 알아주지 않을 때도 많다. 홍보(PR)와 대관(GR) 업무 총괄 시절, 조직과 예산을 유지(확대)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빈 카운터(Bean Counter) 재무책임자(CFO)를 만나면 얼마나 좀스럽게 논쟁해야 했는지. 평화의 시기는, 아무 일도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 일이 없게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아처가 업스트림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의 계산 속에 원인을 포함시켜 놓고, 그 원인이 시간에 따라 어떤 작은 변화들을 만들고,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를 미리 생각해봤다면 어땠을까. 예컨대 당장의 결혼으로 얻을 수 있는 지위 가문 도덕성 같은 것들도, 추후 노력으로 가질 수 있는 것임을 사전에 알았다면 어땠을까. 달라졌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아처의 선택이 실패한 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후회는 줄어들지 않았을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계산된 선택이나 계획이 아니라, 넓게 오래 볼 수 있는, 기다림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시야(視野)가 아닐까 싶다. 눈앞의 현상이 아니라 그 원인을 찾으려는 행동, 이미 지나간 결정이 남긴 무늬까지 되짚으려는 겸손, 애초에 누가, 언제, 무엇을 놓쳤는지를 기꺼이 질문하는 자세 같은 것들 말이다. 다만 그런 삶은 느리고, 비효율적이라서 종종 앞서가는 이들에게 조롱당할 수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믿는다, 시야의 힘을. 계획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고 태도라는 것을.
염색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할까 한다. 다시 말하지만, 애쉬그레이로 염색하려면 탈색 과정을 거쳐야 한다. 머리카락에 뿌리 깊게 박힌 색소를 다스리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염색의 업스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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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태
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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