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탕탕탕!"… 쓰러진 김구, 비극으로 남은 죽음 [오늘의역사]
강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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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26일 정오 서울 서대문구 경교장(현 종로구) 서재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네 발의 총탄에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가 쓰러졌고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에 국민은 절망에 빠졌다. 빈소에는 조문객이 끝없이 몰렸으며 장례 기간 10일 동안 경교장을 찾은 조문객은 약 120만명에 달했다.
문안 인사라던 방문객 그리고 1m 거리의 총구
암살 당시 김구 선생은 경교장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서재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던 그때 육군 포병사령부 장교이자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 소속 당원 안두희가 찾아왔다. 안두희는 문안 인사를 이유로 서재로 향했다. 허리춤에 권총을 차고 있었지만 군복 차림이라는 이유로 비서진은 제지 없이 그대로 들여보냈다.김구 선생을 만난 안두희는 다정하게 "먹을 갈아 드릴까요"라며 다가가더니 약 1m 거리에서 총을 꺼내 발사했다. 네발의 총성을 들은 비서진이 달려왔지만 이미 김구 선생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후였다.
안두희는 경교장을 빠져나갔다가 경비들에게 잡혀 헌병사령부로 연행돼 조사받았다. 초기 진술에서 그는 "백범이 군대를 이용하려 한다는 첩보를 듣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주장했다. 재판 당시에는 "백범이 공산 세력과 손잡으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국가를 위한 결정이라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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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의 2계급 특진과 사면… 끝나지 않은 의혹과 진실
그러나 사건은 단순한 정치적 오해나 개인의 극단적 선택으로 보기엔 의문이 많았다. 안두희는 재판 중 2계급 특진했다. 이어 형을 면제받고 군에 복귀했고 군납업체를 운영하며 안정을 누렸다. 이에 따라 '배후 세력' 의혹이 꾸준히 제기됐다.같은 해 7월2일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이 사건이 한국독립당의 내분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의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7월20일 군 당국은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 한 친공산주의적인 한국독립당의 음모에 맞선 안두희의 '의거'라고 규정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1992년 안두희가 배후를 일부 인정하는 육성 증언이 공개됐고 국회는 조사에 나섰다.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진상 보고서'에 따르면 사건은 단독 범행이 아닌 군부 내 서북청년단 세력과 일부 고위 장성들에 의해 계획되고 실행된 것으로 밝혀졌다. 포병사령관 장은산, 특무대장 김창룡, 총참모장 채병덕 등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정황도 제시됐다. 다만 보고서는 안두희의 행적과 군부의 보호 조치가 이 대통령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했다면서도 직접 지시 증거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김구 선생의 장례는 국장으로 계획됐지만 한국독립당 측이 민족장을 주장하며 정부와 마찰이 빚어졌다. 결국 김규식 선생의 중재로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이는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국민장이었다. 김구는 1949년 7월5일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김구 선생의 죽음은 여전히 국가적 비극이자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통일'과 '자주'의 원칙은 오늘날까지도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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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