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약품의 제품명이나 성분은 외국어로 표기되어 있다. 사진은 서울 종로구 한 약국의 마스크 진열대 사진. /사진=변한석 기자


"멜트블로운이 무슨 뜻이죠?"

지난 20일 기자는 약국에서 마스크를 사려고 했다. 진열대에 있는 한 마스크 포장지에 '멜트블로운(MB) 필터'라는 문구가 있었다. 뜻이 궁금해 계산대에 물어봤다. 종업원은 잘 모르겠다며 약사에게 물었다. 돌아온 말은 "마스크에 있는 소재다"라는 대답이었다.


기자가 의약품 이름 중 영어가 많냐고 묻자 종업원은 많다고 대답했다. 약 성분이 대부분 영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신제품 검색해 보니 외국어 이름이 상당수

네이버에 신제품을 검색하니 외국어 제품명이 대다수였다. 사진은 네이버 검색 결과 캡쳐. /사진=변한석 기자


포털에 신제품을 검색하고 뉴스를 읽어보니 외국어 이름이 대다수였다. 식품, 전자제품 그리고 약품까지 외국어 범람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상품명이 외국어로 도배되는 문제는 오래전부터 제기돼왔다. 단순히 이름이 영어인 게 문제가 아니다. 처음 이름을 듣고 무슨 제품인지 알 수 없는 게 외국어 작명의 문제다.


올리브영에 판매되는 화장품의 이름은 영어가 대부분이었다. 사진은 서울 종로구의 한 올리브영 진열대 사진. /사진=변한석 기자


이번에는 올리브영을 찾아갔다. 판매대를 돌아보니 영어로 된 제품명이 대부분이었다. '보디로션'같은 대체 불가한 외래어뿐만 아니라 '소프트', '피치', '인텐시브' 같은 우리말로 나타낼 수 있는 말까지 영어를 쓰고 있다.

심지어 품절을 솔드아웃(Sold out)이라고 표기했는데, '솔드아웃'은 '품절'보다 음절도 길어 효율로 봐도 우리말로 쓰는 게 공간을 더 절약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직원들은 복잡한 작명을 제대로 이해할까. 올리브영 직원에게 '아토덤 인텐시브밤'이라는 제품의 뜻을 물어봤다. 직원은 이름의 뜻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면서, 보습 크림의 일종이라는 대답했다.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제품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소비하고 있다.

메뉴판이 왜 다 영어죠?

한글 메뉴판이 없는 카페가 늘고 있다. 영어 메뉴판을 사용하는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 사진. /사진=변한석 기자


한글 메뉴판이 없는 카페가 늘고 있다는 말에 기자는 지난 18일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를 다녀왔다. 한 카페에 들어가니 메뉴판이 영문으로 되어 있다.

메뉴판을 보던 손님은 슬그머니 핸드폰을 꺼내 네이버 파파고를 켰다. 영어에 익숙지 못한 사람들에게 영어 메뉴판은 불편만 준다. 카페에 영문 메뉴판만 있는 이유를 묻자 직원은 외국인이 많이 방문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외국어 간판을 쓰는 가게들 사진. 작게 한글도 병기한 곳도 있지만, 아예 한글을 쓰지 않는 가게도 있다. 사진은 서울 도처의 외국어 간판을 쓰는 가게 사진. /사진=변한석 기자


게다가 요즘은 간판부터 외국어인 경우가 많아졌다. 외국어 간판을 사용하는 가게들의 업종도 다양했다. 최근에는 일본어만 쓰는 간판이 많은데 일식 콘셉트라고 하지만 일본어를 읽지 못하는 사람은 가게 위치를 못 찾는 고충도 있다.

'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 광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 제12조 3항에 따르면 광고물은 한글로 표시하는 것이 원칙이다. 외국 문자로 표기할 경우 한글과 병기해야 한다.

간판에 외국어만 쓰면 불법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건물 4층 이하에 설치되는 5㎡ 이하 간판들은 허가·신고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 처벌은 어렵다.

외국어 순화가 꼭 필요한가요?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모두가 알기 쉬운 우리말을 사용하는 걸 권장했다. 사진은 기자가 지난 23일 한글문화연대 사무실에서 이건범 대표와 인터뷰하는 모습. /사진=변한석 기자


하지만 글로벌 시대에 외국어 순화 작업이 꼭 필요한가에 대한 의구심이 있을 수 있다. 모든 언어 순화 운동이 성공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은 블루투스를 '쌈지무선망', 웹툰을 '누리쪽그림'으로 순화했는데 대중화에 실패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우리말 순화 작업을 하는 이유에 대해 "사람들이 표현하지 않는다고 사회에 영어를 못 쓰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라며 "한국 사람은 한국어로 생각하고 대화하기 때문에 모두가 알기 쉬운 우리말을 사용하는 게 좋다"고 대답했다.

이 대표는 또한 "외국어와 외래어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며 "외래어는 컴퓨터, 피아노같이 외국에서 넘어와 한국어로 대체할 수 없어 굳어진 단어를 뜻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말에는 고유어, 한자어, 외래어가 포함되어 있으며 순화해야 하는 건 과도한 외국어 사용"이라고 강조했다.

안전 관련 용어 반드시 쉬운 말 사용해야

안전과 직결된 분야에는 우리말 순화가 필요하다. 서울시 종로구의 한 약국 진열대 사진. /사진=변한석 기자


이건범 대표는 반드시 우리말로 쉽게 표현해야 할 분야로 안전 분야를 뽑았다. 그는 "의약품이나 범죄 용어는 안전과 직결되기 때문에 우리말 순화가 필수"라며 "의사들이 서로 말할 때는 캔서(암)라고 해도 되지만 환자에게 설명할 때는 암이라고 표현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언어 순화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간판이나 메뉴판에 한국어를 표기하지 않는 문제는 한국인의 정체성도 직결된다. 이 대표는 "도시에 외국어로만 된 간판이 많아진다면 도시 정체성에 혼란이 올 수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 권리 측면에서도 한글 없는 간판은 부적절하다. 이 대표는 "일본어로만 된 간판을 쓰는 가게들이 많이 생겼는데, 검색해서 해당 위치에 갔지만 일본어를 몰라 가게를 못 찾는 경우도 있다"며 "소비자 권리를 침해하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외국 용어가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외국어를 계속 쓰게 되면 고착화된다고 했다. 그는 "데이터의 경우에도 자료라는 우리말을 쓸 수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데이터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져 순화가 어렵다"면서 "R&D(연구개발) M&A(인수합병) 같은 한 번에 알기 어려운 단어는 처음부터 쉬운 말로 순화하는 게 좋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