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석유화학 업계는 정부의 규제 완화와 금융·세제 지원 없이는 산업 경쟁력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호소한다. /사진=Gemini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공급과잉으로 벼랑 끝에 몰렸다. 석유화학이 장기 불황에 빠질 것이란 우려가 고조되면서 대규모 구조조정 필요성이 제기된다. 업계 안팎에서는 경쟁력 회복을 위해 정부 차원의 규제 완화와 금융·세제 지원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주요 석유화학사들이 잇따라 생산설비 해체 작업에 착수했다. LG화학은 최근 김천·나주 공장에 대한 일부 설비 철거(스크랩)를 결정했다. 지난해 3월 여수 스티렌모노머(SM) 공장 가동을 중단한 지 1년 반만이다.

부도 위기에 놓였던 여천NCC는 지난 8일부터 여수 3공장 가동을 멈췄다.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12월 여수 2공장 라인 일부 가동을 중단한 바 있다. 대산 에틸렌글리콜(EG) 2공장도 지난해 4월부터 현재까지 멈춘 상태다.


국내 석유화학의 부진 배경엔 중국의 증설이 있다. 중국이 에너지 자립을 목표로 대규모 증설에 나서면서 공급 과잉이 심화했다. 지난해 기준 아시아 에틸렌 시장은 공급이 수요를 15%가량 웃돌았다.

업계는 한계에 직면한 국내 석유화학의 구조 개편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수요 부진에 원료비·전력비 부담까지 겹쳐 자구 노력만으로는 회복이 어렵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기업 간 협업·재편 논의 자체가 제도적으로 막혀 있다는 점이다. 동일 업종 기업이 협업하려면 공정거래법상 경쟁 제한 우려를 해소해야 하지만 공동행위 인가나 기업결합심사 기준이 엄격해 초기 대화부터 가로막히는 경우가 많다.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는 "현행 제도하에서는 실질적인 구조조정 논의가 시작도 못 하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토로했다.

규제 부문에선 공동행위 인가 및 기업결합 심사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 공정거래법상 과잉 공급 산업에 대한 기업결합 심사 기준을 낮춰 경쟁제한상 판단 범위를 기존 산단에서 국가로 확대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비대칭 정보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재편을 위해선 이해 당사자들이 정보를 공유해야 하는데 현재 경쟁법상 공동행위 위반에 해당할 우려가 있어서다. 기업 결합 신청 시 생산, 판매를 위한 가격 정보 공유를 허용하거나 정부가 정보 공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 된다.

설비 합리화나 신규 투자 결정도 제약이 크다. 설비 일부를 철거하거나 고효율 설비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금 부담, 인허가 지연 등이 기업의 결정을 늦추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일부 업체는 구조조정 필요성을 인지하고도 실행 시기를 미루는 실정이다.

구조조정 과정에서는 과감한 선택과 집중이 불가피하다. 경쟁력이 없는 자산은 매각·폐쇄하고 핵심 사업에는 신규 투자를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금 부담과 자금 조달 한계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다.

업계는 일정 기간 법인세 감면, 금융지원 범위 확대 등 정책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특히 현재 정부가 운영 중인 산업은행·수출입은행의 금융지원 프로그램을 구조조정 특화 형태로 확대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전력·열 요금 조정도 단기 위기 대응책으로 거론된다. 석유화학은 에너지 집약도가 높은 산업 특성상 전력·스팀 단가가 수익성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다. 업계는 최소한 구조조정이 진행되는 위기 국면에서는 한시적 요금 조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업계 관계자는 "석유화학 산업은 현재 긴 조정 구간을 지나고 있고 불확실한 대외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국내 석유화학 구조조정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