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정구 전 대우건설 사장 "K원전 잘했다, 에너지전환 준비 철저해야"
1970년대 국내 넘어 아프리카·중동 상대로 발전소 EPC 수주
외환위기로 그룹 해체 후 해외영업 CEO 맡아 경영정상화
개인 그림 전시회와 OB 모임 통해 전·현직 대우맨과 소통
김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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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웨스팅하우스에 원전 1기 수출당 기술사용료 2400억원(1억7500만달러)을 지급하고 기자재 9000억원(6억5000만달러) 구매를 약정한 조건은 다소 아쉽지만 잘한 계약이다."
국내 1세대 원전사업의 권위자이자 외환위기 후 대우건설 경영정상화를 이끈 이정구(82) 전 대우건설 사장(이하 '이 회장')의 말이다.
이 회장은 한국의 경제 성장이 태동한 1960년대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 후 한국전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대우그룹에서 30년, 한양(현 BS한양)에서 3년간의 대표이사 회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현직에서 물러난지 십수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적지않은 정재계 인사가 이 회장과 소통하려 노력하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올해 6월 체코 정부당국을 상대로 체결한 두코바니 원전 건설사업 24조원의 본계약에 대해 이 회장은 "한국이 원천 기술 보유사인 웨스팅하우스와 협상의 우위를 갖기 어렵다 보니 마지못한 선택이겠지만 합작회사를 만든 것은 잘못했다"면서 "계약 조건을 이용해도 기술 사용에 대한 감독이 가능하기 때문에 지휘봉을 넘겨줘선 안됐다. 그러나 이미 한 것이고 잘했다"고 평했다.
한국 컨소시엄은 웨스팅하우스와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 당시 기술 사용과 해외 수출에 동의를 받았다. 하지만 체코 당국은 기술 이전을 요구했다. 이 회장은 "웨스팅하우스 입장에서 승낙할 수 없는 문제고 계약 무효의 리스크가 발생했으므로 기술료 지급과 기자재 구매를 부당한 요구라고 보지 않는다"면서 "24조원 중 2400억원은 큰 금액이 아니다"라고 부연했다.
이어 "일각에서 적자 계약이 아니냐는 비판을 하는데 기업이 손해를 전제하는 경우는 없다"면서 "글로벌 원전 프로젝트 시장에서 레퍼런스가 없으면 수주가 불가하다. 2009년 UAE(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원전 건설의 성과가 없었다면 유럽은 한국에 원전 건설을 맡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수주는 유럽 내 독점 시장이던 원전 분야에서 한국이 최초의 수출 성과를 거둔 사례다.
현 정부가 원전 축소와 환경에너지 확대를 추진하는 정책 방향에 대해 이 회장은 단계적인 계획 수립과 실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독일 북해의 해상풍력발전소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함부르크 법인에서 1년 동안 근무한 경험이 있다.
이 회장은 "풍력단지 등의 초기 건설비가 많이 들면 전기료가 2배, 3배 뛰게 된다"며 "기존 사업 이익을 별도 계정으로 설정해 재생에너지 발전소에 투자하면 원전을 줄여나갈 수 있다. SMR(소형모듈원전) 등 신기술이 지속해서 개발되어 비용을 내리고 원전 축소의 기반을 준비하면 가능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글로벌 원전 시장 수출의 초석 놓다
이 회장은 원전 기술이 부재했던 1976년 대우그룹에 입사해 한국의 건설산업을 플랜트와 에너지, 그리고 EPC(설계·조달·시공) 사업 영역으로 확장했다. 대우건설은 외환위기로 그룹이 해체한 1998년 이 회장을 최고경영자(CEO)로 선임했고 5년 만에 경영정상화를 이뤘다. 이후 3년 만인 2006년 시공능력 1위 건설회사로 올라섰다.당시 안정된 직장이자 선망의 대상이던 한국전력에서 9년의 근무 경력을 뒤로 하고, 미래가 불투명하던 대우엔지니어링에 합류한 결정에 대해 이 회장은 '대우 문화'를 꺼냈다.
"'창조, 도전, 희생.' 젊은이의 가슴을 울렁이게 한 세 단어는 30년간 나의 일터가 된 대우그룹의 사훈이었다.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사훈에 이끌려 30대 초반 대우가족의 일원이 됐다. 대우는 도전 없는 안주를 터부시했고, 실패를 밑거름 삼아 다시 도전하도록 독려하는 기업문화를 가졌다. 스스로 해결하는 재량권을 주어 창조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판을 벌려주는 회사였다."
서울역 앞 위용을 자랑한 대우센터빌딩(현 서울스퀘어)의 첫인상과 '창조, 도전, 희생'이라는 사훈에 매료되어 대우에 입사한 이 회장은 1970년대 국내 최초 상업 원전인 고리원자력발전소 1호기를 시작으로 리비아·나이지리아·오만·알제리·모로코 등에서 발전소 EPC를 건설하는 쾌거를 이뤘다. 대형 화재를 겪거나 수주 실패에 좌절하는 등 수많은 시행착오 끝의 결과였다.
외환위기 후 회사가 자금난에 봉착하자 이 회장은 10년 동안 5억달러의 공사 미수금이 발생한 리비아의 전 최고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2011년 사망)를 사막에서 직접 만나 공사비를 받아냈다. 해당 일화는 국내 언론에도 소개되며 화제를 모았다.
이 회장은 채권단과 약정한 5년보다 9개월 빠른 2003년 12월 워크아웃(재무구조 개선작업) 졸업까지 힘겨운 경영을 이끌었다. 마침내 고(故) 남상국 전 사장과 퇴임하며 정상의 지위를 회복한 대우건설을 후배 세대에 물려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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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뒤 빈자리가 느껴지는 사람이었으면"
전쟁 중인 이란에 가서 발전소를 건설하는 도중 이라크의 공습을 받은 적이 있다. 공습 종료 후에 대우 직원들 전원은 사전 지시에 따라 착오 없이 집합 장소에 모였고 폭파된 사무실로 들어가 중요 서류를 반출했다. 이 회장은 "현장을 이탈해 뿔뿔이 흩어졌던 이란 직원들이 대우 직원들을 보고 '군대보다 더 지독한 조직'이라며 놀라워했다"고 회상했다."이전의 세대는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했지만 목표와 희망이 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음날 출근길에 오르면 즐거웠던 기억 뿐이다. 후배들 세대에 우리는 떠난 뒤 빈자리가 커보이는, 아니면 적어도 빈자리가 느껴지는 선배였으면 한다."
대우건설을 떠난 지 21년이 흘렀고 그동안 두 번의 인수·합병(M&A)이 있었지만, 이 회장은 여전히 과거의 대우와 현재의 대우를 잇는 사람이다.
개인 취미 생활이자 작고하신 부친의 재능을 물려받아 그림을 그리는 이 회장은 2019년과 지난해에 써밋갤러리 전시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현 대우건설 주주 중흥그룹의 총수 일가인 김보현 사장이 참석했다. 공군 출신인 김 사장은 대우건설 인수 후 부사장 직위에 올라 1년에 한 번씩 전직 사장단을 초청해 식사를 했다.
이 회장은 "김 사장께서 '저는 군 출신이라 잘 모른다. 구성원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북돋아 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말을 했다"면서 "진정한 기업가의 마인드를 가진 분이어서 직원들이 대우 정신과 문화를 계승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그는 대우그룹 역사서와 다름없는 개인 저서 '떠난 뒤 그 빈자리가 느껴질 수 있다면'을 2016년 출간한 데 이어 9년 만인 올해 6월 '지공거사의 하루하루(한 경영자의 조용한 성찰이 담긴 노년 일기)'를 펴냈다. 지공거사는 '지하철 공짜로 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젊은 날을 치열하게 살아온 은퇴 세대의 조용한 일상을 담담히 기록해낸 이 회장의 두 번째 책이다.
지난 8월27일 오후 강남의 한 카페에서 이 회장을 인터뷰하던 도중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직 검찰 지청장을 지낸 인사의 전화였다. 그는 이 회장의 새책 출간 소식을 건너 듣고 축하 인사를 전해왔다.
그는 "억울하다고 표현해선 안되겠지만 세상의 눈으로 보면 대우의 역사는 불명예스럽게만 묻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한번 써보자고 결심한 것이 첫 번째 책의 출간이었다"면서 "'떠난 뒤 그 빈자리가 느껴질 수 있다면' 제목은 28년 전 투병하던 고교 동창으로부터 받은 편지글의 한 구절"이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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