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⑬<르포>18세기 대저택에 조성한 스타트업 요람… 누적투자금 2조원 비결은
[아일랜드는 섬이 아니었다] 아이디어를 임팩트로 잇는다
더블린=최유빈,
김성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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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과 산업 전환의 갈림길에 선 한국 경제가 해법을 찾지 못하는 사이, 인구 530만의 아일랜드는 개방과 혁신 전략으로 유럽의 '작은 호랑이'(Celtic Tiger)로 부상했다. 낮은 법인세를 축으로 한 외국인투자 유치, 토종기업을 세계무대에 올려세운 스타트업 지원, 노사정 대화를 통한 사회적 합의 모델 등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성장의 동력으로 꼽힌다. 글로벌 빅테크와 제약 기업들이 몰린 더블린의 산업 클러스터는 한국이 직면한 저성장·고비용 구조를 돌파할 대안으로 주목된다. 본지는 아일랜드 경제 기적의 동력과 한국에의 시사점을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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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 시내에서 남쪽으로 약 6㎞, 택시로 20여분 거리. 도심의 번잡함이 잦아들 즈음 벨필드(Belfield) 지역에 자리잡은 더블린대학교(UCD) 주 캠퍼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메리온 로드(Merrion Road)를 건너 완만한 언덕을 오르자 잔디밭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진 짙은 녹음 속에서 고풍스러운 석조 저택 한채가 시선을 붙잡았다. 1750년경 지어진 귀족의 별장이었으나 지금은 '노바UCD'(NovaUCD)의 본관으로 다시 태어난 메르빌 하우스(Merville House)다. 노바UCD는 대학 연구실·스타트업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실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사업모델이 될 수 있도록 돕는 UCD 산하의 창업지원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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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정문을 밀고 들어서자 약간의 습기를 머금은 돌 냄새가 270년 세월의 무게를 웅변하듯 코끝을 스쳤다. 18세기 조지안 양식(18세기~19세기 초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유행한 건축 양식)의 건물 내부는 우아한 아치 천장과 섬세한 회반죽 장식 등 과거 귀족 저택의 기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 스타트업의 사무공간으로 탈바꿈한 공간에는 한때 말과 마차가 오가던 마구간의 화강암 아치가 여전히 남아, 첨단 혁신의 열기와 역사의 견고한 무게가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유서 깊은 저택은 2003년 아일랜드 혁신 생태계의 중심인 노바UCD로 화려하게 재탄생했다. 노바UCD는 대학의 뛰어난 연구 성과를 상업화하고 아일랜드 스타트업의 성장을 집중 지원해 글로벌 진출을 돕는 임무를 수행한다. '혁신이 곧 성장의 동력'이라는 확고한 인식 아래 UCD뿐 아니라 산업계와 정부도 힘을 보태 설립했다. 눈여겨볼 점은 초기 개발에 투입된 총 1000만유로(약 160억원) 중 무려 75%에 달하는 자금을 민간 부문이 조달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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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AIB), 반도체(AMD), 법률(Arthur Cox), 회계(Deloitte), 통신(Ericsson), 증권(Goodbody) 등 각 산업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설립 후원사로 적극 참여했고 나머지 자금은 국가 창업 지원 기관인 아일랜드 기업진흥청(Enterprise Ireland)과 UCD가 공동으로 부담했다. 이 협력은 대학의 연구 성과를 창업으로 이어가는 일이 더 이상 대학만의 과제가 아니라 아일랜드 산업계와 국가 경제의 핵심 동력이 됐음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이날 만난 미컬 웰런(Miceal Whelan) UCD 대외홍보 팀장은 "노바 UCD는 '기업가 공동체'를 지원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며 "이 공동체에는 입주 기업뿐 아니라 벤처캐피털(VC) 관계자, 비즈니스 멘토 등 스타트업을 돕는 다양한 전문가들이 함께 속해 성장의 시너지를 창출하고 있다"고 했다.
VC부터 UCD 연구진까지 한 지붕 아래… 노바UCD, '사람을 잇는 네트워크'에 방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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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AS TO IMPACT'(아이디어를 임팩트로). 입구에 전시된 홍보 팸플릿에 나지막이 새겨진 이 문구는 노바UCD를 관통하는 핵심 슬로건이다.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교류되고 성장하는 '살아 있는 혁신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노바UCD는, 기술과 자본 지원 못지않게 '사람을 잇는 네트워크' 형성에 주력한다.
공간 구성 역시 네트워킹을 극대화하도록 섬세하게 설계됐다. 가장 큰 특징은 경계를 허문 개방형 구조다. 사무실, 세미나실, 공유 라운지 등을 구분하는 것은 투명한 유리문과 칸막이가 전부다. 시선이 가려지지 않는 덕분에 입주자들은 서로의 활동을 자연스레 엿볼 수 있고, 사무실 복도나 공유 라운지에서 우연히 마주치며 의견을 교환하고 협력의 기회를 포착한다. 웰런 매니저는 "서로의 활동을 보며 배우고 연결되는 것이 이곳의 철학"이라며 노바UCD를 창업가들이 영감을 주고받는 '개방형 혁신 공동체'라고 강조했다.
노바UCD는 이 네트워크를 활용해 스타트업의 성장을 실질적으로 돕는다. 일례로 새로운 투자 유치 기회를 잡도록 국내외 VC를 소개한다. 사이먼 팩터(Simon Factor) UCD 신사업 투자 부문 책임자는 "우리가 하는 일 중 하나는 탁월한 아이디어를 가진 연구자와 상업적 경험이 있는 전문가를 연결하는 것"이라며 "발명가나 과학자들이 사업화 전문가들과 협력해 새로운 스타트업을 설립하도록 팀을 구성하는 것이 노바UCD의 핵심 기능"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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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초월한 디지털 자산 전송 기술을 개발하는 네스티파이(Nestify)의 창립자이자 CEO인 나일 데너히(Niall Dennehy)는 이곳의 협력적인 환경을 높이 평가했다. 올해 노바UCD에 합류한 '신참 CEO'인 데너히는 이전 LG에서 근무한 경력도 갖고 있다. 그는 "우연한 만남 속에서도 흥미로운 연결이 자주 생긴다"며 "노바UCD가 전문가 접근성을 높여주고 네트워크를 체계적으로 구축할 수 있도록 잘 지원해주는 덕분"이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노바UCD는 스타트업이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실질적인 혜택을 세심하게 챙겨준다. 사업계획 수립부터 투자 유치, 법률·회계·기술 등 전문성을 깊숙이 녹여낸 멘토링 프로그램, 인재 제공까지 포괄적인 비즈니스 지원 프로그램을 모두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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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혁신적인 시설에 합류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노바UCD는 단순히 아이디어만으로 입주를 허락하지 않는다. 해당 기술이 국제 시장에서 확고한 경쟁 우위를 갖는지, 그리고 VC 투자를 통해 빠르게 규모를 확장(스케일업)해 나갈 가능성이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심사한다. 이 요건이 충족하게 되면 대학의 연구 성과를 사업화하는 '스핀아웃(Spin-out) 기업'은 물론, 외부 스타트업이 협력을 위해 입주하는 '스핀인(Spin-in) 기업'까지 모두 지원한다.
이처럼 단단하게 구축된 공동체와 전방위적 지원 시스템은 곧 스타트업의 성장, 그리고 국가 경제의 발전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노바UCD는 개소 이후 20년 동안 550개가 넘는 기업을 성공적으로 지원했다. 이들이 유치한 누적 투자금은 13억유로(약 2조800억원)에 달하며 매각·상장 등 주요 엑시트 가치만도 2억5000만유로(약 4000억원) 이상을 기록했다. 이러한 성과는 고부가가치 중심의 양질의 일자리 창출로도 이어졌다. 현재 노바UCD 지원 기업들은 아일랜드 내에서만 650명 이상의 정규직 고용을 책임지고 있다.
선수 맞춤형 스포츠 기술을 개발한 '아웃풋스포츠'(Output Sports)와 아일랜드 최초의 양자 컴퓨팅 분야 스타트업 이퀄원랩(Equal1 Labs) 등은 UCD 연구진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탄생한 대표적인 스핀아웃 성공 사례다. 이퀄원랩은 직원은 50여명 뿐이지만 6000만유로(약 960억원)에 달하는 투자 유치에 성공하며 양자 컴퓨팅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뿐만 아니라 데이터 보안 분야의 딥테크 기업 비나리랩(Binarii Lab)처럼 외부 스타트업인 스핀인 기업들 역시 이곳에서 UCD의 세계적인 연구 인프라와 긴밀히 협력하며 가파른 성장 곡선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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