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대 생계에 위협을 느낀 아일랜드인들은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이들인 미국의 정재계를 주무르는 핵심 인물로 자리잡았다. 미국 대통령 46명 중 조 바이든, 버락 오바마 포함 23명이 아일랜드계다. 사진은 세인트 패트릭 데이(3월17일)에 바이든과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아일랜드 총리로부터 '샴록'을 받아드는 모습. 샴록은 아일랜드의 상징으로 '행운', '희망', '조화'를 뜻한다. /사진=로이터



18세기 중엽 아일랜드 서부 해안에 정체불명의 병이 돌았다. 감자가 썩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굶어 죽어갔다. 1845년부터 7년간 이어진 이른바 '대기근'(Great Famine)이다. 아일랜드인 100만명이 숨졌고, 200만명은 조국을 등졌다.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바다를 건넌 그들은 대부분은 미국으로 향했다.


이때 미국에 건너간 아일랜드 후손은 오늘날 미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각계각층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아일랜드 인구가 530만명에 그치지만 미국에 사는 아일랜드계 인구는 3100만명에 달한다. 조 바이든 대통령, 존 F. 케네디(JFK) 대통령, 오바마 대통령 외가 등이 아일랜드 혈통을 공유한다.

디아스포라란 무엇인가… "뿔뿔이 흩어졌지만, 결코 잊지 않았다"

지난 3월17일 미국 뉴욕 맨해튼 5번가에서 열린 제264회 세인트 패트릭 데이 퍼레이드에 녹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아일랜드 국기를 들고 참여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디아스포라'(Diaspora)는 본래 고대 그리스어로 '흩뿌리다'라는 뜻에서 유래한 단어다. 조국을 떠나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이주민 공동체를 뜻한다. 유대인을 비롯해 아르메니아, 중국, 인도, 그리고 아일랜드가 대표적이다. 디아스포라는 단순한 해외 이민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국적과 거주지는 달라도 조국에 대한 정체성과 유대를 강하게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아일랜드는 '디아스포라의 나라'다. 해외 거주 아일랜드계 인구가 자국 인구의 10배에 달한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아일랜드라는 뿌리를 결코 잊지 않았다. 성 패트릭 데이(St. Patrick's Day)마다 초록색 옷을 입고 거리를 행진하는 것, 백악관에서 대통령이 '샴록'(아일랜드 삼엽초)을 받는 전통 등이 이런 정체성의 표현이다.


미국 사회 곳곳에도 아일랜드계 인물들이 포진해 있다. 워싱턴 정계는 물론 맨하튼 금융가, 할리우드, 펜타곤, NASA까지 다양한 곳에서 역할을 한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유기적인 '아이리시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조국 아일랜드와도 연결돼 있다.

정치에선 바이든 전 대통령이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그는 공개적으로 "나는 아일랜드계 대통령"이라고 자처하며 방아쇠를 당기면 '대니 보이'(Danny Boy)가 흘러나올 것 같다고 농담할 정도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역시 아일랜드계이고 존 F. 케네디는 아일랜드계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 46명 중 23명이 아일랜드계로 분류된다.


재계에선 골드만삭스 CEO(최고경영자) 데이비드 솔로몬이 아일랜드계다. '아이리시 머니'(Irish Money)라 불리는 자산가 네트워크도 월가에 뿌리 깊다. 미 육군 합참의장을 지낸 마틴 뎀프시 장군도 아일랜드계 출신이며 NASA 최초의 여성 사령탑 캐시 리더스도 아이리시다. 헐리우드에서는 메릴 스트립, 톰 크루즈, 리암 니슨, 콜린 파렐 등 아일랜드계 배우들이 할리우드 상위권을 점령하고 있다.

연대의 힘, 교육의 힘… 아일랜드 민족성이 만든 글로벌 네트워크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Trinity College Dublin)은 1592년 설립된 아일랜드 최고(最古) 명문 대학으로, 영국 옥스퍼드·케임브리지와 함께 '서구 3대 고전 대학'으로 불린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새뮤얼 베킷과 오스카 와일드, 아일랜드 전 대통령 메리 로빈슨 등을 배출했으며, 유럽 최고의 인문·과학 연구기관 중 하나로 꼽힌다. 사진은 트리니티 칼리지 캠퍼스 전경. /사진=최유빈 기자


어떻게 이런 '세계적 인맥'이 만들어졌을까. 아일랜드의 민족성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먼저, 교육열이 강하다. 감자기근 직후에도 아일랜드 부모들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자신이 굶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문해율은 1800년대에도 유럽 최상위권이었고 이는 이민 후 후손들이 주류 사회에 진입하는 디딤돌이 됐다.

둘째는 공동체 의식과 연대다. 아일랜드인은 가족과 고향, 종교를 중심으로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해왔다. 처음 미국에 도착한 이민자들은 '카운티별 클럽'을 만들고 같은 출신 지역 사람들끼리 정보와 일자리를 공유했다. 후에는 정치 후원, 기업 설립, 미디어 운영 등으로 그 영향력을 확장시켰다. 지금도 뉴욕시 경찰(NYPD)의 40%가 아일랜드계란 말이 있을 정도다.


셋째는 조국에 대한 애착이다. 단순히 성공한 이민자가 아니라 고향을 잊지 않는 정서가 아일랜드 디아스포라를 특별하게 만든다. 세계 각국의 아이리시 커뮤니티는 자발적으로 조국에 기부하고 자녀에게 아일랜드 문화와 언어를 가르치며 조국의 발전을 돕는다.

한국도 할 수 있다… 아일랜드와 닮은 '작은 거인의 유전자'

UCD(University College Dublin, 더블린대학교)는 아일랜드 최대 규모의 종합대학으로, 현재는 3만8000명 이상의 학생이 재학 중인 세계적 연구 중심 대학이다. UCD는 언어 선택 과목으로 한국어(Korean Gen Purp 1·2 등) 강의를 제공한다. 사진은 UCD 캠퍼스 안에 위치한 한국식 치킨가게 'CHIMAC'(치맥). UCD 캠퍼스 내 노점 중 치맥 앞에만 긴 대기 줄이 있었다. /사진=최유빈 기자


아일랜드의 디아스포라와 한국 상황은 결코 다르지 않다. 교육열, 공동체 의식, 조국에 대한 애착은 한국인 역시 오랜 시간 품어온 민족적 DNA다.

해외에 나간 한인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헌신하고 지역 한인회와 교회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꾸려왔다. 조국의 위상이 흔들릴 때면 먼저 나서서 국격을 지키고 고국 기업의 진출을 돕는 사례도 많다.

아일랜드가 감자기근 이후 절망 속에서 세계적 네트워크를 만든 것처럼 한국도 충분히 '글로벌 코리아'를 만들어갈 수 있다. 750만 재외동포는 이미 세계 곳곳에 뿌리내린 우리의 '확장된 영토'다. 이제 필요한 건 이들을 하나로 엮을 정책적 상상력이다.

작은 나라 아일랜드가 세계를 연결하는 힘을 가진 건 단지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국민 스스로 '우리끼리라도 해보자'는 마음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같은 에너지를 갖고 있다. 디아스포라는 단지 이민의 산물이 아니라, 민족이 세계로 나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