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23일 북한이 인천 옹진군 연평도 일대에 포격을 실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진은 2010년 11월23일 인천 옹진군 연평도 일대에 북한의 포탄이 떨어진 모습. /사진 제공=해병대사령부


2010년 11월23일 북한군이 평화롭던 인천 옹진군 연평도 마을에 170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이로 인해 해병대 장병 2명(서정우 하사, 문광욱 일병)이 숨지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민간인은 2명도 숨졌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했다. 각종 시설과 가옥이 파괴되는 등 재산피해도 막심했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북한이 우리 영토와 민간인을 직접 겨냥해 포격을 가한 것은 1970년대 이후 전례를 찾기 힘든 만행이었다.

23명 사상 남긴 1시간의 참상

사진은 북한의 기습 포격으로 사망한 해병대원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의 추모비. /사진제공=인천광역시 옹진군


북한의 도발 명분은 억지였다. 당시 우리 군의 정례적인 해상사격 훈련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일대에서 이뤄졌다. 북한군은 이를 핑계로 기습 도발을 감행했다. 북한군은 이날 오후 2시34분 122㎜ 방사포와 해안포로 연평부대와 민가에 무차별 포사격을 했다. 주민들은 불길 속에서 대피령을 들었다. 당시 하교하던 연평초등학교 학생들이 위험에 노출되기도 했다.

우리 군은 K9 자주포 3대를 동원해 80여발의 응사하는 등 침착하고 단호하게 대응해 북한의 추가 도발을 막아냈다. 이후 군 당국은 국지도발 최고 대비태세인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며 총력 대응 태세에 돌입했으나, 이미 연평도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후였다.


이날의 비극은 해병대원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각인된다. 당시 말년 휴가를 앞두고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던 고 서정우 하사(추서 계급). 그는 부대 쪽에서 치솟는 연기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발길을 돌렸다. '북한군의 도발'이라는 직감 하나로 자진 복귀하던 그는, 야속하게도 적의 포탄 파편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당시 입대한 지 두 달 된 고 문광욱 일병(추서 계급) 역시 포병 사격 훈련장에서 임무를 수행하다 유명을 달리했다.

민간인 2명의 사망과 수십 명의 부상자 그리고 파괴된 가옥들은 '국지도발'이라는 군사용어로 덮기엔 너무나 처참한 상처였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사진은 서해수호의 날(3월28일)을 맞아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외벽에 설치됐던 용사들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사진이 담긴 꿈새김판. 서해수호의 날은 2002년 제2연평해전,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과 연평도 포격전으로 희생된 우리 군인 55명을 기리고자 2016년에 제정된 법정기념일이다. /사진=뉴스1


군사 전문가들은 연평도 포격 도발이 철저히 계산된 정치적 행위였다고 입을 모은다. 당시 북한은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권력이 이양되던 과도기였다. '어린 후계자' 김정은이 군부 장악과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해 전략적인 도발을 감행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공교롭게도 김정은은 김정일군사종합대학에서 포병학을 전공했다.


또 북한은 NLL을 무력화하고 새로운 해상경계선을 설정하려는 의도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북한은 이런 목적으로 ▲1999년 6월15일 제1연평해전 ▲2002년 6월29일 제2연평해전 ▲2010년 3월26일 천안함 피격 등 서해에 선제공격을 감행해왔다. 결국 연평도를 집어삼킨 화마는 북한 체제 결속을 위한 '피의 제물'이었던 셈이다.

포화가 멎은 지 15년이 흘렀지만 서해 5도를 감도는 긴장감은 여전하다. 매년 11월이 되면 생존 장병과 유가족들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와 싸우며 그날의 공포를 다시 마주한다. 종전이 아닌 휴전, 전투는 멈췄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