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⑧기명 교수 "노력이 배신… 청년 분노는 사회적 비명"
[청년리포트 1부-억울한 청년] 기명 고려대 예방의학교실 교수 인터뷰
"병원 치료만으론 한계… 국가가 '실패해도 괜찮다'는 시그널 줘야"
황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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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대한민국 청년층은 단순한 상실감을 넘어 '억울함'과 '불안'에 갇혀 있다. 공정 가치가 무너졌다는 배신감과 기성세대의 질타는 억울함을 키웠고, 불투명한 미래와 생존 기반 붕괴는 불안을 심화시켰다. 이 두 감정은 정치 양극화, 젠더 갈등, 혐오 확산을 촉발하며 소비 위축과 인구 절벽이라는 구조적 위기로 이어졌다. 청년리포트는 청년의 현실을 통해 억울함과 불안의 뿌리를 진단하고, 사회적 파급과 해외 사례를 분석해 한국 사회의 해법을 모색한다.
"남들보다 덜 자고 더 공부했는데 취업 문은 닫혔다.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집은 살 수 없다. 그런데 어른들은 '노력이 부족하다'고 한다."
대한민국 청년들이 토해내는 공통된 호소다. 이는 단순한 슬픔이나 우울함이 아니다.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한다는 배신감이자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분노다.
사회역학자인 기명 고려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머니S와의 인터뷰에서 청년들이 앓고 있는 마음의 병을 '고장난 한국 사회가 보내는 위험 신호'라고 경고했다. 그는 "지금 청년들의 분노는 불평등과 능력주의가 낳은 사회적 비명"이라며 "병원의 처방전만으로는 이 억울함을 치료할 수 없다"고 진단했다.
기 교수는 억울함의 근원을 '사회적 결정요인'의 붕괴에서 찾았다. 건강은 ▲개인의 자존감(방어기제) ▲가족·동료의 지지(관계) ▲사회적 안전망(구조)이 균형을 이뤄야 유지되는데 한국 사회는 이 균형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노력하면 보상받는다는 믿음, 즉 '공정의 사다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불평등이 고착화됐고 청년들은 구조적 한계 속에 갇혀 버렸다. 이는 감염병이나 사고처럼 피할 수 있는 위험이 아니다. 숨 쉬는 공기처럼 만연한 불공정 속에서 청년들의 방어 기제는 바닥을 드러냈다."
기 교수는 한국 사회가 구조적 문제를 방치한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높은 자살률과 OECD 국가 중 가장 긴 정신질환자 병원 재원 기간을 증거로 들며, 사회가 감당해야 할 몫을 의료 기관에 떠넘긴 결과라고 지적했다.
전쟁 때보다 더 비참한 '상대적' 가난… SNS가 만든 '비교 지옥'
기 교수는 청년들이 체감하는 가난과 박탈감이 기성세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분석했다. 과거 절대적 빈곤의 시기에는 다 같이 가난했기에 역설적으로 연대가 가능했지만 지금 청년들이 느끼는 '상대적 빈곤'은 전쟁 시기의 배고픔보다 더 비참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대 사회는 강화된 불평등이 SNS와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전시되며 질투와 과시욕을 키우고 있다"면서 "당장 월세를 걱정하는 청년들 눈앞에 스마트폰 속 명품과 해외여행의 이미지가 수도 없이 쏟아진다. 매일 타인의 화려한 삶과 비루한 나의 현실을 비교하며 비참함이 몇 번이고 재생되는 구조"라고 말했다.
기 교수는 청년들을 더욱 억울하게 만드는 건 '능력주의'라는 이름의 폭력이라고 했다. 한국 사회의 '성공 신화' 방식이 오히려 청년들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끊긴 현실에서 "네가 실패한 건 노력이 부족해서"라는 메시지는 저주이자 낙인으로 다가온다는 설명이다.
그는 토론토 대학 정신과 전문의 마크 시너의 연구를 인용해 "대중이 역경에 대한 대처, 희망, 위기 극복과 회복의 서사에 노출될수록 자살 충동은 감소하고 긍정적인 삶의 의지가 강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캐나다와 한국의 미디어가 실패와 성공을 다루는 태도의 차이를 짚었다. 캐나다 공영방송 CBC에는 10년째 방영되고 있는 'Now or Never'(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장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실패담을 통해 실수와 실패는 인간 경험의 일부임을 보여주며 그들이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담담하게 조명한다.
반면 한국의 미디어는 도달 불가능한 성공 신화만 조명한다. 기 교수는 "이런 환경에서 청년들은 고통의 원인을 사회가 아닌 '내 탓'으로 돌리며 스스로를 갉아먹는다"며 "이것이 억울함이 자기 파괴로 이어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국가의 메시지… 범부처 '구조 개혁' 시급"
이처럼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는 학업에서 취업으로 넘어가는 '생애 전환기' 청년들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기 교수는 이를 '전환 실패'라고 설명하며 이 시기의 좌절이 장기적인 사회적 고립이나 '니트'(NEET·무직이면서 교육이나 직업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 상태로 이어지고 있다고 봤다. 그는 "실패 경험이 반복되면서 '학습된 무기력'이 청년들을 지배하고 있다"고 경고했다.그렇다면 이 억울함과 불안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기 교수는 "이제 병원 치료나 상담 센터 확충만으로는 안 된다"고 단언했다. '정신질환'(Mental Disorder) 치료를 넘어 '정신건강'(Mental Health) 증진, 청년의 삶을 둘러싼 사회 구조를 바꾸는 방향으로 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해법으로는 보건복지부뿐만 아니라 교육부, 고용노동부, 국토교부 등 모든 부처가 참여하는 '범부처 협력'을 제시했다. 그는 "핀란드는 청년 정신건강 문제를 고용과 교육의 문제로 보고 다부처가 개입한다. 네덜란드는 '조기 교육 중단자'를 국가가 관리해 낙오를 막는다"며 "우리도 교육 과정 개선, 고용 안전망 확충, 주거 지원 등 생애주기 전반에 걸쳐 보다 근원적이고 종합적인 해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말미, 기 교수는 기성세대와 정책 입안자들에게 묵직한 제언을 던졌다.
"사람은 누구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줄이고 싶어 한다. 국가 개입의 강도는 청년들이 '한번 실패해도 괜찮다', '이건 낙오가 아니다'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한다. 노인 기초연금이 노인의 존엄을 지켜줬듯 이제 국가는 청년들에게 '너희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회가 지켜주겠다'는 확실한 시그널을 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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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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