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 사진=뉴시스


연초부터 기업 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의 입법이 잇따라 추진되면서 재계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형사처벌 중심의 현행 법체계 하에서 사업주의 책임만 대폭 강화하는 법안이 그대로 시행될 경우 기업의 경영 부담이 심화할 것이란 우려에서다. 기업들은 추가적인 규제입법에 앞서 당초 정부와 여당이 약속했던 배임죄 개선부터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26일 재계에 따르면 올들어 당정은 3차 상법개정안과 노동자 추정제 등의 입법에 속도를 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자사주 의무 소각'을 골자로 한 3차 상법개정안을 기업들의 주주총회 시즌인 3월 이전 국회 본회의 통과를 목표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자사주 의무 소각은 강력한 주주환원 정책 중 하나로 꼽힌다. 기업들이 그간 경영권 방어를 위해 보유했던 자사주를 소각할 경우 주주들이 가진 주식 가치가 상승하면서 기업가치 역시 재평가될 수 있어서다.


민주당은 최근 이재명 정부의 공약인 '코스피 5000' 달성이 현실화한 상황에서 3차 상법개정안을 통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 '코스피 6000' '코스피 7000' 시대의 추동력에 힘을 싣겠다는 구상이다.

재계는 M&A 등 사업 목적상 필요한 자사주에 대해선 일부 예외 규정을 두고 기존부터 보유하고 있던 자사주에 대해선 유예기간을 늘릴 것 등을 요구하고 있으나 여당은 '원안 그대로' 추진 방침이 확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노동자 추정제' 입법 역시 재계의 우려를 키우고 있다. 이 제도는 임금 체불이나 퇴직금 분쟁이 발생했을 때 다른 사람의 사업을 위해 일했다면 일단 노동자로 간주하는 것으로 프리랜서·특수고용직·플랫폼 종사자 등 노동법안 사각지대에 있던 노동자들의 '근로자성'을 보장하는 법안이다. 정부는 5월1일 근로자의 날까지 입법을 완료할 계획이다.

제도가 도입되면 근로자성 입증의 책임은 사업주에게 있다. 사업주가 '근로자 아님'을 객관적으로 입증하지 못하면 사실상 노동자로 인정돼 최저임금, 주휴수당, 퇴직금, 4대 보험 적용 등 노동법상의 권리가 보장된다.


이를 두고 재계에서는 근로기준법 위반이 형사 처벌로 이어질 수 있는 국내 형법 구조에서 노동자 추정 범위가 넓어질 경우 사업주의 사법리스크가 증가할 것이라고 반발한다.

문제는 재계가 반발하는 법안은 속도를 내고 있지만 재계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배임죄 개선' 등의 논의는 뒷순위로 밀려나 있다는 점이다.

형법상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 '재산상 손해'를 입힌 경우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같은 '임무 위배'와 '재산상 손해'의 개념은 지나치게 모호하거나 포괄적이다. 특히 결과 중심의 사후적 평가 구조로 인해 사업주의 처벌 위험성이 크다는 지적을 받는다. 미래를 내다본 신사업 투자, M&A 등 경영상의 판단이나 결정조차 기업의 실적에 손해를 입힐 경우 배임 행위로 간주될 수 있어서다.

재계 관계자는 "경영상 투자는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에 대한 위험을 수반하고 있는데 배임죄는 투자 결정 시의 정당성보다는 '재산상 손해'가 발생했는지 결과에 따라 유·무죄를 판단한다"며 "이는 기업의 경영 위축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당정은 지난해 9월 열린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 태스크포스' 협의에서 상법개정안 보완책으로 '배임죄 폐지' 또는 '전면 개선'을 약속한 바 있다. 상법개정안으로 소송 리스크가 커질 것이란 재계의 반발을 고려한 것이다.

이와 관련한 대체입법안은 여전히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해 말 정부가 2차 경제형벌 합리화 TF에서 '형벌' 대신 징벌적 손해배상 등 '과징금'을 대폭 상향하는 구상안을 밝혔지만 이 역시 기업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재계의 반발이 크다. 대한상공회의소·한국경제인협회 등 경제8단체는 26일 배임죄 개선에 대한 경제계 입장을 담은 건의서를 국회와 정부에 제출했다.

형법·상법·특경법상의 배임죄를 조건 없이 전면 개편하고 미국이나 영국처럼 사기·횡령죄로 처벌하거나 민사적으로 해결한다는 게 골자다. 배임죄의 구성요건과 처벌 기준도 명확히 정의하고 '경영판단원칙'을 상법과 형법에 명문화하자는 내용도 담겼다.

재계 관계자는 "배임죄 개편과 경영판단원칙의 명문화를 통해 명확한 법적 기준이 세워지고 예측 가능한 법 집행이 이뤄질 것"이라며 "이를 통해 기업 경영에 활력이 생기고 투자와 혁신을 통한 잠재성장률 제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