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성북동 전경 /사진=허창무씨 제공
숙정문은 5가지 면에서 도성 안 다른 문과 차별화된다. 첫째, 다른 문은 모두 평지 또는 낮은 언덕에 있으나 숙정문만 유일하게 산속에 있다. 4대문과 4소문의 격식을 갖추려다보니 별로 필요 없는 문을 산속에 세웠다. 게다가 성문 앞뒤로 길이 없어 제구실을 못했다.
둘째, 현재 여러 성문 중 양쪽 성벽이 모두 남아 있는 건 숙정문뿐이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성문 양쪽 성벽이 없어졌고 창의문과 혜화문, 광희문은 한쪽만 남았다.
셋째, 성문 이름에 유교의 덕목인 오상(五常)의 이념을 넣지 않은 유일한 문이다. 동쪽의 ‘인’(仁), 서쪽의 ‘의’(義), 남쪽의 ‘예’(禮)를 각 대문의 이름에 넣어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이라 했지만 북문에는 그런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대신 탕춘대성의 성문인 홍지문(弘智門)에 반영했다는 설이 있으나 홍지문은 도성 축조시점으로부터 300년도 더 지난 숙종 때의 일이어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넷째, 서울성곽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홍예 천장에 그림이 없다. 숭례문과 흥인지문, 광희문에는 용이, 창의문과 혜화문의 천장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숙정문에는 문루가 없다. 이곳에 문루를 올렸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영조 때는 숙정문을 암문으로 표시했다. 현재의 문루는 1975년 문을 복원할 때 세웠다. 태조 때 문루가 있었을 것이라는 희박한 근거에 따라 이제까지 없었던 문루를 올렸다. 게다가 현판마저 원형과 다르게 복원된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 문루가 있었다면 현판을 ‘肅淸門’(숙청문)이라 썼을 것이다. 그리고 연산군 10년(1504) 성문의 위치를 오른쪽으로 옮긴 것이라면 지금의 위치보다 좀 더 서쪽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 있던 자리에 성문을 복원했어야 할 일이다. 또 숙정문으로 부르기 시작했을 때는 문루가 없었으므로 현판도 없는 게 당연하다. 어설픈 복원은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길 뿐이다.
숙정문 밖으로 나온다. 숙정문 밖에서는 성북동 끝자락 숲속의 삼청각이 궁궐처럼 보인다. 삼청각은 1972년 준공됐다. 그해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고 이어 남북적십자대표단의 만찬이 그곳에서 열렸다. 군사정권시절 내내 밀실정치와 요정정치의 주무대였지만 지금은 대중음식점과 전통문화 공연장으로 꾸며 시민에게 개방한다.
2010년 2월에는 북악하늘길이 개방됐다. 또 ‘김신조루트’라는 길을 따라 ‘하늘마루’에서 북한산 형제봉 능선으로 갈 수도 있다. 이 길은 1·21사태 직후 폐쇄했다가 42년 만에 개방했다.
말바위/사진=허창무씨 제공
◆말바위쉼터와 전망대
다시 숙정문 안으로 들어가 성곽을 따라 내려가면 ‘말바위쉼터’가 있다. 여기서는 창의문쉼터에서 받은 목걸이번호표를 반납해야 한다. 이 쉼터 벽에는 2007년 4월5일 백악산 개방을 기념하는 황지우 시인의 시 한편이 걸려있다. ‘풍경 뻬레스트로이카’다. 백악산 개방을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정책 ‘페레스트로이카’에 빗댄 시다.
이곳을 내려가면 ‘말바위전망대’를 만난다. ‘말바위’ 이름은 그곳에서 가까운 삼청공원에 말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말’은 한자의 음이면서 뜻이기도 하다. 한자의 음으로 보면 ‘끝’( 末)이 되는데 백악산의 산줄기가 여기서 끝나기 때문에 ‘말암’(末岩)이라고 불렀고 뜻으로 보면 ‘말’(馬)이어서 ‘마암’(馬岩)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뒤 이름에 관한 몇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바위가 말의 안장을 닮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말의 머리를 닮았다는 것이며 셋째는 조선시대 관리들이 말을 타고 와서 이곳에 매어두고 산에 올라 자연을 즐겼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이곳 안내판에는 세번째 설을 기록했지만 다른 문헌에는 대체로 바위의 형상과 관련된 설명이 많다.
이곳은 경관이 수려해 조선시대 선비나 관리가 아니라도 망중한을 즐기던 장소이다. 그래서 이곳은 도성 안 종로구 방향과 도성 밖 성북구 방향에 ‘서울시 선정 우수 조망명소’라는 안내판이 하나씩 세워져있다.
◆와룡공원으로 향하다
나무계단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온다. 도성 밖 산책길은 완만한 데다 숲이 우거져 걷기에 좋다. 숲속 산책길을 즐기면서 와룡공원에 도착한다. 이 공원은 와룡(臥龍)이라는 뜻과 같이 용이 누워있는 것처럼 공원의 능선이 평탄하게 쭉 뻗어있다. 이 능선이 명륜동3가와 성북동의 법정동 경계다. 와룡공원은 조선시대에는 문묘의 뒷산이어서 숲 보전지역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 학교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성곽을 따라 걸어 내려가면 성북동으로 나가는 작은 암문이 나온다. 이 암문에서 성북동마을을 보면 윗동네와 아랫동네로 확연히 구분된다. 아래쪽으로는 ‘북정마을’이라는 이른바 달동네가 자리 잡았고 위쪽으로는 성북동 부촌이 널찍하게 숲속에 자리 잡았다.
북정마을에는 아직도 1960~1970년대 산동네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오래된 주택이 성벽 바로 밑까지 빽빽하게 붙어있다. 이 마을은 조선 영조시대에 메주를 만들던 동네였다고 한다. 이곳이 재개발되면 마을의 구수한 전설과 더불어 가난한 주민들은 김광섭 시인의 비둘기떼('성북동 비둘기')와 마찬가지로 정든 동네를 떠나야 할 처지에 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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