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리움미술관에서 한국현대미술 관련 강의를 들었다. 이인성, 오지호를 시작으로 이중섭, 박수근, 천경자, 김환기, 이우환, 권진규 등 내노라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접했다. 파격을 거듭하는 백남준이나 이불의 작품 세계는 쇼크 그 이상이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은 누가 뭐래도 이쾌대였다. 이름부터 얼마나 강렬한가.

이쾌대는 대중에겐 잘 알려지지 않다. 이쾌대는 1953년 남북한 간 휴전과 함께 실시된 포로교환에서 북한행을 선택한 월북화가다. 반공이데올로기와 함께 한동안 남한 미술계에선 금기시됐다. 1987년 해금되면서 회고전이 열리고 다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유족들이 작품들을 고이 간직해 작품상태도 매우 뛰어나다.
 
통일을 기다리는 화가

이쾌대의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이 비교적 잘 알려진 작품이다. 이쾌대는 푸른빛 저고리를 입고 붓과 팔레트를 들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강렬한 눈빛이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자화상의 뒷 배경으론 물동이를 인 여인네가 구비구비 시골길을 지나가고 올망졸망 모여있는 초가집이 펼쳐진다. 논과 밭이 그려져 있고 구릉이 낮은 산야가 첩첩이 쌓여있다. 구도상 모나리자의 초상화도 연상케 하고 고흐의 자화상 느낌도 난다. 서양화 기법을 써 유화로 그렸지만 한국화풍이다. 이쾌대의 강렬하고 굳건한 의지와 한국인의 기개가 묻어난다.

이쾌대의 인생은 드라마틱했다. 이쾌대는 1913년 경북 칠곡군에서 태어났다. 대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일학년 담임이었던 장발선생의 권유로 미술을 시작했다. 장발 선생은 장면 총리의 아들이었다.

이쾌대의 형인 이여성은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였다. 땅문서를 팔아 독립운동 군자금을 마련했고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다. 이쾌대도 이여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쾌대는 그림만 그리는 작가가 아니었다. 다양한 조직 활동도 했다. 동경제국미술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뒤 귀국해 조선미술가협회를 조직했고 독립 후에는 좌파 성격의 조선미술동맹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1947년 전후 평양으로 갔지만 공산당이 강요하는 혁명화에 실망해 조선미술동맹에서 이탈한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좌익계열의 남조선미술동맹에 가담했고 인민군 종군화가로 참가했다. 결국 전쟁 중 국군에 체포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됐으며 휴전을 앞둔 포로교환 때 북한행을 택했다.

부인 유갑봉과 러브스토리는 로맨틱하다. 이쾌대는 휘문고 재학 시절 당시 진명여고를 다니던 유갑봉을 만나 첫눈에 반했다. 열렬한 사랑의 편지를 보냈고 유갑봉의 초상을 그린 사랑의 엽서도 보냈다. 결국 결혼에 성공했다. 하지만 행복한 결혼생활도 잠시, 이쾌대가 월북을 선택하면서 부부는 떨어져 살아야 했다.

이쾌대의 작품이 재조명받은 것은 부인 유갑봉이 그의 작품을 고이 간직하다 회고전에 내놓으면서다. 이쾌대는 1965년 위암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부인 유갑봉은 1980년 숨을 거뒀다. 

통일을 기다리는 화가
 
통일을 기다리는 화가

이쾌대의 '드로잉'                                                                                   이쾌대의 '봄처녀'
 
사실적 묘사로 시대정신 담아

이쾌대는 인물화를 주로 그렸다. 해부학적 지식을 기초로 그려진 서양화의 기본을 따르고 있다. 기초적인 드로잉 작업에도 공을 많이 들였다. 지난해 대구미술관이 가진 이쾌대전에선 유족들이 보유하고 있던 드로잉 60점이 첫선을 보였다. 반쯤 찢어진 자화상 드로잉은 그 자체로 완성품을 보는 듯 하다. 손을 그린 드로잉과 모자를 쓴 작가의 인물화, 크로키로 스케치한 인물화 등에서 이쾌대의 탄탄한 기본기를 알 수 있다.

서양화에 기초를 둔 탄탄한 기본기를 갖췄지만 누구보다 한국적인 그림을 그렸다.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 세계를 완성했다. 가장 많이 쓴 소재는 여인상이다. 부인 유갑봉을 그린 그림도 많고 무희나 봄처녀 등도 단골 소재였다. 붉은 저고리를 입고 산야를 걷는 봄처녀는 부드러우면서 암울한 분위기가 풍겨 긴장감이 감돈다. 자화상도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외에도 어두운 분위기나 이국적인 모습을 연출한 자화상도 있다.
 
통일을 기다리는 화가

이쾌대의 '걸인'

'걸인'이란 작품은 소재부터 구도, 표현까지 모든 것이 새롭다. 1948년 만든 성북동 회화연구소 인근을 배회하던 걸인을 그린 작품이다. 건장한 체격의 걸인이 밥그릇을 들고 배회하는 모습을 그렸다. 내리 깔린 눈빛과 사실적인 표현에서 시대의 아픔을 읽을 수 있다.

시리즈로 제작한 군상은 서사적이면서 사실적 묘사로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혼란한 시대상과 그 속에서 질서를 찾길 원하는 작가의 희망이 담겼다.

나름의 해학도 담고 있었다. '카드놀이하는 부부'는 부인과 자신이 카드놀이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세잔의 카드놀이하는 사람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이쾌대는 세잔을 좋아했다고 한다. 세잔의 카드놀이하는 사람은 최근 2000억원이 넘는 가격을 받아 역대 최고가 그림으로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이쾌대의 그림 가격은 얼마나 될까.

이쾌대의 작품은 시장에 많이 나오지 않았다. 대부분 작품을 유족들이 보유하고 있다. 월북 화가란 이미지 탓에 거래도 많지 않다. 2010년 서울옥션에 출품된 부부상은 8500만원에 낙찰됐다. 이에 앞서 2002년 출품된 친구의 초상은 팔리지 않았다.

지난 1월 중국 심천에서 열린 북한미술작품 경매에서도 이쾌대의 작품이 나왔다. 하지만 얼마에 낙찰이 됐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북한에서 직접 나온 작품은 위작 논란에 휩싸이기 쉽다.

한 작가의 작품이 제대로 평가를 받으려면 어느 정도 거래가 활발하고 시대적인 가치를 담고 있어야 한다. 이쾌대의 작품은 통일이 이뤄지면 천정부지 값이 뛸 것이란 평가를 받는다. 월북화가란 꼬리표 탓에 매겨진 마이너스 프리미엄은 사라지고 진위 논란도 해소할 수 있다. 시대정신을 담은 작가란 점과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 희소성과 높은 퀄리티까지 감안하면 이쾌대의 작품은 인기 요인을 다분히 보유하고 있다.

해마다 6월이 되면 통일과 남북 관계를 되짚어본다. 올해는 특히나 정치권의 종북 논란이 뜨겁다. 통일은 미술시장에도 또 다른 화두를 던진다. 이쾌대의 작품을 다시 들여다 보는 이유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3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