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28일 LG그룹이 단행한 박진수 LG화학 대표이사 사장의 부회장 승진은 파격적이다. 지난해 12월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맡은 지 1년 만에 부회장으로 올라섰기 때문. 그룹 신입사원으로 출발해 부회장에 도달하는 기록도 세웠다.

박 사장의 승진은 화학부문 사업에 속도를 붙이겠다는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의중이 담긴 것으로 관측된다. 자타가 공인하는 화학업계 대표 전문경영인인 박 사장의 승진은 어쩌면 당연한 결정일 수 있다.

현장의 덕장 결국 '更進一步'

◆정통 ‘화학맨’의 활약

1977년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럭키 공채로 입사한 박 사장은 35년 동안 화학분야에만 몸담아온 정통 ‘화학맨’이다. 그는 LG화학의 경쟁력 강화에 있어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전기차 배터리 분야 세계 1위, 2차전지 분야 세계 2위, 아시아 최고이자 세계 6위 종합화학회사는 그동안 박 사장이 이룩한 성과의 일부분이다. 국내 화학업종 ‘매출 20조원 시대’를 연 주역도 그였다. 지난해 23조2630억원의 매출을 올리면서 이전 최고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LG화학을 지휘하고 있는 올해도 ▲나프타분해센터(NCC) 세계 1위 에너지 효율 달성 ▲해외 대형 프로젝트 추진 ▲전기자동차 전지 시장선도를 통한 미래사업 집중 육성 ▲연구개발(R&D) ▲글로벌 인재 확보 및 육성 ▲일하는 방식의 혁신 등을 목표로 내걸며 글로벌시장에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박 사장이 이끈 성과는 그룹 인사에 직접적으로 작용했다. 구 회장의 선구안은 박 사장을 놓치지 않았다. 그동안 구 회장이 강조해 온 인사 방침인 시장선도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사업체질 강화’와 미래를 준비하는 철저한 ‘성과주의’, 위기상황을 돌파할 ‘책임경영’은 박 사장의 부회장 승진에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재계 관계자는 “박 사장은 지난해 석유화학과 정보전자소재, 전지 등의 사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전기차용 배터리시장을 선도하는 등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며 “화학사업을 세계적인 위치에 올려놓은 데는 그의 풍부한 ‘현장경험’이 큰 몫을 했다”고 평가했다.

◆해답이 있는 현장서 ‘소통’

'현장에 답이 있다'는 신념을 가진 박 사장은 회사의 각종 사업이 암초에 부딪힐 때마다 결정적인 해답을 제시했다.

1980년대 초 럭키의 여수 공장에서 생산과장으로 재직할 당시 박 사장이 폴리스티렌(PS) 생산 라인 공정을 바꿀 때의 일화는 유명하다. 일반공정에서 연속공정으로 전환한 후 시운전을 하는 과정에서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알고 봤더니 기계와 배관을 단단한 플라스틱 덩어리가 꽉 막아 버린 것. 그는 사생결단의 각오로 사직서를 책상 고무판 밑에 넣어두고 공장에 야전침대를 깔았다. 밤낮없이 현장에서 밤을 새웠고 3주 만에 라인을 재가동시켰다. 일본의 기술고문들이 “재가동하는 데 최소한 6개월이 걸린다”며 고개를 젓던 사고였다.

엔지니어 출신인 박 사장은 20년에 가까운 풍부한 현장경험으로 공장 구석구석 업무까지 꿰뚫고 있다. 직원들과의 소통도 원활해 전형적인 '덕장' 형 리더로 평가받는다.  

그는 불필요한 격식을 차리지 않는 CEO로 소문나 있다. 임원들은 물론 직원들에게까지 집무실을 활짝 열어 놓는다. 실제 그의 집무실에는 업무상이나 개인적인 고민으로 찾아오는 임직원들이 상당수다. 직원들과 대화를 마치고 나면 꼭 문밖까지 배웅한다. 진급한 직원에게는 직접 작성한 문자메시지나 이메일을 보낸다. 그는 “좋은 회사를 만들기 위한 비전은 누구나 제시할 수 있지만 이를 실현하는 것은 결국 강한 실행력에서 비롯된다”며 솔선수범의 중요성을 늘 강조한다.

일례로 박 사장이 생산 현장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공장장들이 밖에서 대기하며 그를 영접하자 “정해진 일정대로 돌아다니지 않을 테니 절대 밖에서 기다리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박 사장은 형식적인 보고도 일절 받지 않는다. 직원들과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한다. 여수공장을 방문할 때는 4시간 이상을 직접 걸어 다니며 500여명의 직원들과 모두 악수를 나누고 대화한다. 해외 출장도 늘 수행원 없이 혼자 다닐 정도로 격식을 차리지 않는 실용파 경영자다.

박 사장의 경영철학은 ‘뺄셈론’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는 “진정한 프로는 뺄셈을 우선으로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덧셈을 우선으로 한다”며 “자원과 시간은 한정돼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것은 과감히 버리고 꼭 해야 하는 일과 본질적인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되새긴다.

◆‘백척간두 갱진일보’로 정면돌파

사실 LG화학의 올해 매출은 지난해 대비 소폭 하락했다. 지난 3분기 실적을 보면 LG화학은 매출 5조8651억원, 영업이익 5163억원, 순이익 3523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매출은 0.5% 증가했지만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각각 14%, 23.3% 줄었다. 다른 회사들 역시 시장침체로 인한 실적 악화에 신음하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LG화학은 그룹의 차세대 성장동력인 친환경 전기차의 핵심인 배터리로 성과를 내고 있다. GM, 포드, 르노, 현대·기아차 등 10개 이상의 굵직한 글로벌 전기차 회사를 고객사로 확보하고 안정적인 물량으로 대응하며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박 사장은 ‘정면돌파’를 선언했다. 향후 전기차 수요가 늘어날 것에 대비해 생산라인을 더욱 늘리겠다는 것. 그는 “미국 전기차시장이 회복 기미를 보여 미국 공장 가동을 결정했다”며 “2015년까지 미국 공장의 생산라인을 2개 더 증설하겠다”고 말했다.

박 사장의 각오는 ‘백척간두 갱진일보’(百尺竿頭 更進一步)다. 백 척의 장대 끝에 서 있더라도 다시 한걸음 더 나아간다는 의미다. 업계는 그동안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린 박 사장의 현장감각과 전문지식이 이번 부회장 승진으로 인해 한층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박진수 LG화학 대표이사 사장은…
▲1952년 3월1일 출생 ▲1977년 서울대 화학공학과 학사, ㈜럭키 프로젝트실 입사 ▲1996년 LG화학 특수수지사업부장 상무, LG화학 기능수지사업본부 ABS PS사업부장 상무, LG화학 여천 스티렌공장 공장장 ▲2000년 LG화학 화학CU 특수수지 사업부 부장 상무 ▲2003년 현대석유화학 공동대표이사 부사장 ▲2005년 LG석유화학 대표이사 부사장 ▲2008년 LG화학 석유화학사업본부 본부장 사장 ▲2013 LG화학 대표이사 사장 ▲2014 LG화학 대표이사 부회장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0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