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 해임 건은 아버지(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뜻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지난 1월13일 일본 출장을 마치고 김포공항에 도착한 후 기자들에게 건넨 말이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롯데가(家)의 승계구도는 향후 장남에서 차남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재계에선 이를 두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경영권을 이양받았을 때와 닮을 꼴이라 해석한다. 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은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대신 삼남인 이건희 회장을 선택했다. 이맹희 전 회장은 고 이병철 회장의 3남5녀 중 장남이다. 그는 한때 삼성그룹의 후계자로 거론됐지만 이건희 회장에게 경영권을 내줬다.

롯데가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될 조짐이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아들인 신동주 전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은 각각 1954년생, 1955년생으로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연년생이다. 하지만 장남 대신 차남이 롯데의 대권을 이어받음으로써 형 대신 동생이 그룹 1인자의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결국 이건희 회장과 신동빈 회장 모두 초대회장이 직접 간택한 셈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일본 출장을 마치고 지난 13일 저녁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사진=머니투데이 임성균 기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일본 출장을 마치고 지난 13일 저녁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사진=머니투데이 임성균 기자

◆선대회장의 차남사랑 진짜 이유

이건희 회장과 신동빈 회장의 공통점은 또 있다. 부친으로부터 경영능력과 리더십을 모두 인정받은 케이스다.

신 회장이 이끄는 한국롯데의 매출규모는 형이 경영해 온 일본롯데보다 13배 이상 많다. 일본 롯데그룹은 연간 매출이 지난해(3월 결산법인) 5조7000억원이지만, 한국 롯데그룹의 매출은 지난해 83조원에 달한다.

물론 처음부터 일본롯데의 규모가 작은 것은 아니었다. 일본에서 그룹의 초석을 닦아온 롯데인 만큼 두 형제에게 한일 양국의 통솔권을 쥐어줄 때까지만 해도 신 총괄 회장은 장남인 신 전 부회장에게 규모가 더 큰 계열사를 맡겼다. 그런데 한국롯데가 지난 1980년대 말 일본 롯데의 매출을 뛰어 넘었다.


신동주 전 부회장
신동주 전 부회장

이건희 회장도 경영 능력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는 기업인이다. 이 회장은 1987년 취임한 이래 삼성을 국내 정상은 물론,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이 회장이 취임할 당시 삼성의 매출은 13조원대에 불과했지만 지난 2013년에는 338조원이나 됐다. 27년 만에 매출이 26배 늘어난 셈이다. 특히 디램(DRAM), 랜드 플래시 메모리, 플라즈마디스플레이패널(PDP),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브라운관 등 세계 1위 제품도 모두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유교사상에 젖어 장남이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고 이병철 회장이 이건희 회장을 선택할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유교적 전통에 의해 장자 승계 원칙을 따르는 기업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 회장이 삼성 후계자로 낙점된 이후 기업내 장자승계에 대한 고정관념은 깨져가는 모양새다.

신동빈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또 다른 공통점은 아버지로부터 각별히 관심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병철 회장은 이건희 회장에 대해 힘든 경영대신 마음 편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이 삼성의 경영을 원해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에서 이건희 회장에 대해 “내가 겪은 기업경영이 하도 고생스러워 중앙일보만 맡았으면 하는 심정이었지만 본인이 하고 싶다면 그대로 놔두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적었다. 한일 롯데그룹을 위해 셔틀경영을 펼쳐온 신 총괄 회장이 최근 한국에서만 계속 머무는 것도 신 회장에 대한 애정이 높기 때문으로 재계는 평가한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차이점도 있다. 이병철 회장은 1970년대 이미 ‘3남 후계’ 방침을 확정했다. 그는 1987년 11월 작고했다. 타계한지 17여년 전부터 일찌감치 후계자 승계구도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신 총괄회장은 올해로 93세다. 신동주 전 부회장의 임원 사임으로 후계구도 변화가 급물살을 타고 있지만 롯데 측에선 아직까지 공식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후계자를 명확하게 지목하지 않은 셈이다.

 

고 이병철 회장, 고 정주영 회장, 신격호 총괄회장(왼쪽부터)
고 이병철 회장, 고 정주영 회장, 신격호 총괄회장(왼쪽부터)



◆ 신격호의 경영 욕심… '왕자의 난' 부를까



신격호 총괄회장의 경영 흐름을 보면 지난 2000년 '왕자의 난'을 겪은 현대그룹이 떠오른다. 신 총괄회장은 경영을 하고 결제를 하기엔 이미 고령이다. 통상적으로 보면 현직에서 벌써 물러났을 나이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창업주) 역시 85살까지 현대의 경영권을 놓지 않았다. 때문에 롯데와 현대는 모두 고령 창업자의 리스크를 피할 수 없었다.

신 총괄회장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홀수달은 한국롯데를, 짝수달은 일본롯데를 직접 챙기던 '셔틀경영'을 2012년 이후 중단했다. 작년 10월 이후엔 매일 보고 받던 계열사 숫자도 평소의 절반으로 줄였다. 고령으로 인해 기력뿐만 아니라 기억력도 저하되고 있어서다.

당시 정주영 회장도 비슷했다. 정 회장은 언제부턴가 오전에 사인한 내용과 오후에 사인한 내용이 서로 달랐을 정도로 경영 판단이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승계구도가 불확실한 점도 당시 현대의 후계구도와 닮았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롯데 임원직에서 물러났지만 지분은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 만약 신 총괄 회장이 신 회장을 차기 롯데 대권주자로 간택했다해도 신 부회장이 지분으로 경영에 참여한다고 하면 결국 다툼으로 번질 수밖에 없다. 때에 따라선 지분 확보를 통해 롯데그룹을 신 회장으로부터 가져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은 지난 2000년 '왕자의 난' 사태 전부터 승계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래저래 시간을 끌다 현대차 경영권을 둘러싼 형제간 분쟁이 터졌다. 결국 정몽구 회장은 자동차·정공을, 고 정몽헌 회장은 건설·전자·상선, 정몽준 의원은 중공업 등을 각각 맡게됐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6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