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PD의 톡쏘는 이야기] '문화 대사' 벨기에 맥주
탁재형 PD의 톡쏘는 이야기 / 벨기에편
탁재형 다큐멘터리PD·여행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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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바야흐로 물 건너온 맥주의 전성시대다. 해외 여행이 대중화되었듯 외국 맥주 역시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신토불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는데는 이유가 있을터. 외국 물 좀 먹어본 여행다큐PD가 이들 맥주를 국적 별로 정리했다. 그런데 이 남자, 여행 책보다 술에 대한 책을 먼저 쓴, 고수였다.
지난해 3월20일 오후 그랜드하얏트호텔 1층의 바는 테이블마다 각기 다른 맥주와 그에 맞춰 맥주잔을 세팅하는 종업원들로 부산스러웠다. 저녁 시간이 되자 실내는 일군의 유럽인과 한국인으로 가득 찼다.
벨기에 현지의 맥주 생산자들 그리고 한국의 맥주 수입업자와 블로거 등이 이날 행사의 참석자였다. 가장 먼저 연단에 올라 환영인사를 사람은 다름 아닌 프랑수아 봉땅 주한 벨기에 대사였다.
"2014년 월드컵 무대에서 함께 뛰었던 것처럼 오늘 훌륭한 벨기에 맥주를 시음하며 새로운 관계를 맺고 정을 나누는 밤이 되길 바랍니다."
그 뒤를 이어 벨기에의 유서 깊은 브루어리 대표들이 각자의 맥주에 대한 발표를 시작했다. 새로운 비즈니스의 기회를 포착하려는 사람들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이 행사의 명칭은 '2014 벨기에 맥주 시음회'. 주한 벨기에 대사관이 직접 기획한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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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도 면적에 2500종이 넘는 '고장 맥주'
"벨기에 대사관에서 먼저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마침 새롭게 수입할 만한 맥주를 찾던 중이어서 참여하게 됐죠." 이날 행사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돼 벨기에 맥주 '스트라프 헨드릭'과 '브뤼흐스 조트'를 수입하는 노진호 비티알 커머스 이사의 이야기다.
"마치 선거유세를 하듯이 차례대로 무대에 올라와 서로 자신의 맥주가 최고라고 유머 있게 주장해서 분위기가 매우 흥겨웠습니다. 기존의 벨기에 맥주는 대부분 현지의 수출전문 에이전트를 통한 것이라 비쌀 수밖에 없었는데 양조장과 직접 거래를 하게 돼 합리적인 판매가에 좋은 맥주를 수입할 수 있습니다. 벨기에에서 생산되는 맥주의 60% 정도가 수출돼요" 이날 행사를 기획한 에바 뷜테 벨기에 대사관 투자상무참사관의 말이다.
"브루어(Brewer 맥주생산자)들도 해외 파트너를 찾는데 열심히죠. 박람회와 해외에서 벌어지는 맥주 관련 행사에 참여해 홍보 활동을 해요." 인구가 1120만명인 벨기에는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나라다.
맥주 관련 취재 때문에 벨기에를 방문했을 때 나를 마중 나온 현지 브루어가 '죄송하지만 정말 멀리 가야 해서 피곤하시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고 말해 얼마나 먼지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돌아온 답은 '자동차로 2시간'이었다. 하지만 맥주 유니버스에서 벨기에가 차지하는 영토는 절대 작지 않다. 경상도만한 국토면적 안에 450여개의 브루어리들이 오밀조밀 들어차 있다.
"역사 때문이에요. 예전부터 도시마다 양조장이 있었고 그곳에서 각 가정에 맥주를 배달했어요. 물을 믿고 마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안전한 음료로써 맥주가 필요했던 거죠." 벨기에의 할브만 브루어리 수출담당 매니저 스티브 스노바에르트 씨의 말이다.
벨기에의 오래된 브루어리들은 대부분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맥주 가짓수가 넘쳐나는 벨기에지만 정작 현지인들은 자기 '고장'의 맥주를 쉽사리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그 지역 사람들의 별명이 맥주의 이름으로 굳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쾌활한 브뤼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광대'라는 별명이 그대로 맥주 이름이 된 '브뤼흐스 조트'(브뤼헤의 광대) 그리고 한 주정뱅이가 달에 물을 끼얹어 끄려고 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메헬렌의 맥주 '마네 블뤼세르'(달을 끄는 사람) 등이 그런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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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주는 벨기에의 문화대사"
브루어리의 개수는 이런 측면에서 이해가 간다고 하지만 2500가지에 달하는 맥주의 종류와 파격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다양한 양조방법은 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벨기에 메헬렌의 허이헤 브루어리. 이곳은 분홍색 코끼리가 그려진 라벨로 유명한 '데릴리움'을 비롯한 다양한 맥주를 생산하는 곳이다.
"양조실에서만 25가지의 맥주를 만들어요. 여기에 과일즙 등을 첨가해 만들어지는 최종 제품군은 50여가지입니다." 이 브루어리는 한동안 '초콜릿이 들어간 맥주'를 판매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지금도 갖가지 과일즙이 들어간 맥주는 물론 유기농 몰트로 만든 맥주, 글루텐이 함유되지 않은 맥주 등 시대별 유행에 맞는 다양한 맥주를 만들어낸다.
맥주를 만들 땐 물·보리·홉 이외엔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맥주순수령'이 아직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독일의 브루어들이 본다면 어안이 벙벙해질 노릇이다. 실험적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다양한 스타일의 맥주가 공존하게 된 이유를 벨기에 헨트 관광청의 얀닉 드 코큐 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벨기에는 역사적으로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 의해 점령당했죠. 우리는 그 나라 사람들의 음료 문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들의 문화로부터 가장 좋은 부분을 받아들여서 우리 것으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다양성이 풍부해졌죠. 또 한가지 요소는 맥주를 만들 때 브루어들의 마음가짐이 기본적으로 '노 룰'이라는 점이에요. 누군가가 실험적인 재료로 맥주를 만든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문제 삼지 않죠. 맛있으면 그만이니까요."
이런 말을 들으면 대체 어떤 맛이 날지도 모르면서 맥주 양조통 안에 아무거나 던져넣는 장난꾸러기들을 연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벨기에, 특히 북부 플란더스 사람들은 일에 있어선 농담이 통하지 않는 장인정신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은 과거의 오랜 경험으로부터 새로운 맥주가 가야 할 방향을 유추하고 그것을 위해 시도해 볼 재료를 결정한다. 주한 벨기에 대사관의 플란더스 대표부 역시 맥주 수출에서 농담이 통하지 않는 장인 정신의 소유자들이 일하는 곳이다.
한국의 맥주수입업자들과 벨기에 현지생산자들을 네트워킹하는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도 이들은 벨기에 맥주를 수입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모든 정보를 제공한다. 자국의 맥주를 알릴 수 있는 저널리스트를 벨기에로 초청하는 일에도 적극적이다. 에바 뷜테 참사관에게 벨기에 맥주는 대사관 업무의 한축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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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단순히 맥주를 파는 것 이상을 생각하죠. 맥주는 벨기에의 문화 대사(Ambassador)나 마찬가지니까요. 전통, 품질, 다양성과 즐거움 같은 벨기에의 가치를 벨기에 맥주가 대표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들어본 것 중 가장 멋진 외교정책에 대해, 금발머리 아가씨의 머릿결을 닮은 벨기에 블론드 맥주 한잔을 걸치며 심도 있게 토론해 볼 기회는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낮맥을 걸치기엔 대사관 직원들의 업무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 만찬과 함께 즐길 때 : 다크 애비 비어 Dark Abbey
(중세 수도원 스타일로 진하게 양조된 맥주 - 스트라프 헨드릭 쿼드루펠, 굴덴드락900 쿼드루펠)
- 나들이 갈 때 : 프리미엄 필스너 Primium Pilsner
(필스너 스타일에 벨기에 식으로 해석한 가볍고 산뜻한 맥주 - 스텔라 아르투아, 마튼즈 필스너)
- 더운 여름날 : 프레쉬 프루트 비어 Fresh Fruit Beer
(람빅이나 바이첸 등에 과일즙을 첨가한 맥주 - 세인트루이스 프리미엄 크릭, 데릴리움 레드)
- 친구와 담소를 나눌 때 : 블론드 스페셜 에일 Blonde Special Ale
(풍부하고 치밀한 거품에 드라이한 뒷맛이 특징인 벨기에 식 에일 - 브뤼흐스 조트, 듀벨)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9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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