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 김현정씨(31·가명)는 평소 거래하는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를 찾아 ISA(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 사전예약을 신청했다. 김씨는 ISA 사전예약 이벤트에 당첨되면 하와이여행을 갈 수도 있다는 소식에 들뜬 마음으로 은행을 찾았지만 정작 ISA에서 돈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 설명을 듣지 못해 의구심이 들었다. 

 
# 자영업자 박영섭씨(38·가명)는 신한은행 광교영업부지점에서 통장을 개설하다 창구직원으로부터 ‘ISA 출시안내서비스 신청서’를 받았다. 창구직원은 박씨가 ISA 출시 안내에 동의하면 3월7일 이후 전화로 ISA 자산배분전략을 먼저 안내받을 수 있다고 귀띔했다. 박씨는 중소형자동차 경품이 걸린 ISA 사전예약 이벤트에 솔깃했지만 금융사의 광고전화에 이골이 난 터라 신청서만 받고 집에 돌아왔다.


/자료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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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능통장’으로 불리는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도입에 은행권의 경쟁이 과열되면서 불완전판매를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은행들은 수백만원에 달하는 경품을 내걸고 ISA 사전예약 마케팅에 공을 들이는 데 반해 고객들은 ISA에 담을 상품 정보를 얻기 어렵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ISA 사전예약은 오는 3월14일 전산시스템 등록 이전에 상품이 출시되면 전화로 상품을 상담한 후 전산등록 당일 직접 은행에 방문하거나 홈페이지에서 ISA 거래를 확정짓는 방식이다. 사전예약이 즉시 상품 가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상품운용전략이나 수수료 부과방식 등을 뒤로 한 ‘묻지마 가입예약’으로 확대되고 있다.


ISA투자일임형은 ISA신탁형과 달리 은행과 금융투자회사가 투자자에게 일임받은 범위 내에서 직접 편입상품과 비중 등을 결정하고 운용하므로 원금손실 우려가 있다. 따라서 은행과 금융투자회사는 투자자에게 손실 발생 가능성을 알려줘야 하지만 사전예약 시 이를 알려주는 곳은 드문 것으로 파악됐다.

◆‘묻지마 가입’ 가능성 크다


최근 시중은행은 고객들에게 미리 포트폴리오를 알려주는 등 ISA투자일임업 행정지도를 위반하며 ISA 사전예약에 나섰다. 고객들은 금융사가 미리 알려준 정보에 현혹돼 본인과 맞지 않는 상품에 가입하는 등 난처한 상황에 처할 우려가 있다.

금융위원회의 투자일임형 ISA제도 행정지도안에 따르면 금융사가 ISA투자일임형을 취급하기 위해선 2월22일부터 금감원에 모델 포트폴리오를 사전보고해야 한다. 보고 후 7영업일이 지나기 전 투자자에게 포트폴리오를 제시할 수 없고 모델 포트폴리오에 편입되는 금융상품의 종류, 비중, 위험도 등 자산배분에 관한 사항도 홍보·광고할 수 없다.


그러나 기자가 지난 2월16일 은행, 증권사에 방문해 직접 창구에서 문의한 결과 몇몇 직원들이 “3월14일 출시 일주일 전에는 포트폴리오가 어느 정도 구성되므로 내용을 일부 안내해줄 수 있다”며 사전예약을 유도했다. 금융사들은 사전예약이 이벤트라고 강조하지만 실상 ISA 가입고객을 포섭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홍보·영업인 셈이다.

지금까지 ISA는 비과세부문이 부각됐지만 연 2000만원 가입한도에 200만원 이상의 수익을 올리기 위해선 단순계산상 10% 이상의 수익을 올려야 한다. 10% 이상 수익률은 예·적금 운용만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해외채권형이나 해외주식형펀드 등 고수익·고위험 투자상품 위주로 담아야 한다.


또 ISA상품은 앞으로 부과될 수수료도 파악하고 가입해야 한다. 고객이 금융사에 펀드운용을 맡기는 퇴직연금과 비교했을 때 ISA펀드는 판매사(은행)가 펀드 등을 운용하면서 받는 보수수수료 0.5%를 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지만 이런 설명을 제대로 해주는 곳은 없다.

금융전문가들은 ISA 사전예약이 2013년 재산형성저축(재형저축) 예약판매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한다. 2013년 은행들이 재형저축 출시를 앞두고 고객에게 거래신청서와 신분증 사본을 미리 받았던 영업관행과 흡사하다는 것. 당시 금감원은 은행이 재형저축상품의 약관과 금리가 결정되기 전에 사전예약을 받은 것은 불완전 판매라고 판단하고 집중점검을 실시했다.

이에 대해 금감원 관계자는 “은행 영업담당 부행장들에게 ISA 고객유치 시 과당경쟁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ISA상품이 출시되기 전이어서 불완전 판매를 점검하기 곤란하다”며 “모델 포트폴리오 사전보고와 전산구축 등이 이뤄진 후 영업관행도 면밀히 모니터링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소비자연맹은 금융사 간 ISA 유치경쟁이 치열해져 투자성향을 무시한 투자, 투자회유 등으로 소비자 피해가 우려된다고 지적한다.

금융소비자연맹 관계자는 “한 은행과 수년간 거래한 고객은 해당 은행직원들과 인간적인 관계가 형성돼 그들을 믿고 권유하는 상품에 가입하는 경향이 있다”며 “증빙자료를 첨부하는 등 투자성향을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분류해 고객에게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전예약 후 투자일임업 허용

은행이 ‘묻지마 ISA 사전예약’에 열을 올리는 데는 금융당국의 급급한 정책마련이 한몫한다. 은행들이 ISA 사전예약을 받은 것은 1월 말부터다. KEB하나은행이 1월25일부터 일주일간 ISA 사전예약을 받았고 우리은행은 2월2일 업계 최초로 ISA전용상품을 출시하면서 사전예약 우대조건을 내걸었다.

금융위가 ISA 활성화 방안을 발표한 것은 지난 2월14일. 은행이 ISA 사전예약을 받는 도중에 ISA투자일임형 상품취급이 허용되면서 2월14일 이전에 사전예약한 고객의 경우 은행도 ISA투자일임형을 취급하는지 모른 채 우선 가입했다. 더욱이 ISA상품에 대한 금융당국의 감독규정도 구체화되지 않아 불완전판매 등 ISA의 사후처리가 부실해질 우려도 크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ISA상품 관련 제재나 규제를 담당할 감독부서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기존에는 은행과 금융투자회사가 법규를 위반할 경우 각각 은행준법검사국, 금융투자준법검사국에서 제재 조치했지만 ISA상품의 위반사항은 자본시장감독국에서 감독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자본시장감독국의 신탁·일임투자업무팀이 은행과 금융투자회사가 동시에 취급하는 ISA를 상품별로 감독한다는 것. 신탁과 투자일임형 ISA를 분석해 상품구조와 제도를 살핀다는 복안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조직개편 후 최근 인사가 단행돼 상당수의 담당자가 바뀐 상황”이라며 “금융위가 조만간 ISA 관련 감독규제와 담당부서에 대해 결론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ISA의 시장규모는 최대 460조원으로 추산된다. ISA 가입자격을 갖춘 국민 2300만명 모두 연간 납입한도 2000만원을 투자했다고 가정했을 때 나오는 값이다.

금융당국이 국민 재산 늘리기 프로젝트로 도입한 ISA는 금융사의 과당경쟁으로 자칫 수백조원에 달하는 손실을 안겨줄 수 있다. 새로운 정책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정책 그 자체보다 사후관리에 있는 법. 금융소비자들의 안전한 자산관리 형성을 위해 ISA 감독규제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2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