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한국기업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지금까지 선진국을 모방하는 패스트팔로어 방식으로 많은 성과를 이뤄냈지만 이제 새로운 창의성과 혁신 없이는 선진국을 뛰어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경제에 대한 손경식 CJ그룹 회장의 진단이다. 초고속성장시대가 저물고 저성장시대를 맞아 한국기업들은 패스트팔로어에서 퍼스트무버로의 진화를 요구받는다. 시대의 물결을 거스른 기업의 말로는 불문가지. 새로운 시대를 맞을 준비에 나선 기업들을 살펴봤다.


스타트업 삼성 컬처혁신 선포식. /사진제공=삼성전자
스타트업 삼성 컬처혁신 선포식. /사진제공=삼성전자

◆체질개선 나선 삼성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이 퍼스트무버 전략을 앞세워 변신을 준비 중이다. 지난 3월24일 삼성전자가 발표한 ‘스타트업 삼성 컬쳐혁신’ 선언이 변화의 시발점이다. ‘스타트업 삼성’이라는 슬로건에는 삼성의 새로운 지향점이 담겨 있다. ‘관리의 삼성’으로 대표되는 수직적 조직문화를 탈피해 스타트업기업처럼 열린 소통의 문화를 지향하면서도 빠른 실행으로 지속적으로 혁신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 구체적인 조직문화 대수술 방안은 이달 중 발표될 예정이지만 호칭·직급 변경, 눈치성 잔업 퇴출 등을 통한 업무 생산성 제고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지난 3월30일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퍼스트무버’의 저자 피터 알렉산더 언더우드를 초청해 강연을 들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 한국인, 한국경제의 미래와 혁신’이라는 주제로 지금까지의 성공방정식으로 통했던 패스트팔로어 전략을 버리고 퍼스트무버로 거듭나기 위한 방법을 중심으로 강연이 진행됐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현재는 가상현실(VR), 사물인터넷(IoT) 분야 외에 퍼스트무버라고 내세울 만한 부문이 딱히 없지만 앞으로는 스타트업 문화를 접목해 임직원들이 내놓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해 다양한 분야의 퍼스트무버로 진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LG 65인치 UHD OLED디스플레이. /사진제공=LG디스플레이
LG 65인치 UHD OLED디스플레이. /사진제공=LG디스플레이

◆LG, 시장선도 분야 집중

디스플레이업계 선두주자 LG는 삼성과 중국업체의 거센 도전 속에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에 총력을 기울여 TV부문 선도자의 입지를 굳힌다는 방침이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대화면 OLED TV 상용화에 10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LG디스플레이는 액정디스플레이(LCD)가 주류를 이루던 2009년 15인치 OLED 출시라는 파격적 행보를 시작으로 소형 OLED를 건너뛰고 곧바로 대화면 OLED 상용화에 나섰다. 수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2013년 2월 세계 최초 55인치 OLED TV 양산에 나섰으며 이 과정에서 플렉시블(휘어지는) 디스플레이 개발에도 성공했다. 앞으로도 LG는 경기 파주 P10공장 등에 총 10조원 이상을 투입해 초대형 OLED 생산과 플렉시블 OLED 생산경쟁력을 높일 계획이다.


LG화학은 지속적으로 투자해 온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서 시장 선도주자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국내 현대·기아차, GM·포드·크라이슬러, 유럽 다임러·아우디·르노 등 20여곳에 이르는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 전기차에 탑재할 배터리 공급계약을 체결했으며 최근에는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네비건트리서치가 발간한 자동차용 리튬이온 배터리 보고서에서도 종합 1위를 차지했다.


LG그룹 관계자는 “OLED TV, LG화학 배터리 부문 등 이미 세계시장을 선도하는 분야에 투자를 늘려 선도자의 입지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바이오시밀러 개척자 ‘셀트리온’

존슨앤존스에서 개발한 레미케이드(류마티스관절염 치료제)의 바이오시밀러 ‘램시마’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본격적인 바이오시밀러 시대를 연 셀트리온은 이 분야 선도 기업이다.


최근 급성장 중인 항체의약품시장의 주요 제품 특허가 끝나는 시점을 겨냥해 바이오시밀러시장에 뛰어든 셀트리온은 해외에서 잇달아 제품의 효과를 인정받았다.


2013년 9월 바이오시밀러 최초로 유럽의약품청(EMA) 허가를 받은 램시마는 지난 4월 미국식품의약국(FDA) 판매 승인을 받으며 미국시장 개척에도 성공했다. 바이오시밀러가 글로벌 ‘빅2’시장으로 꼽히는 유럽과 미국의 허가를 모두 통과한 것은 셀트리온이 처음이다.


현재 상용화된 제품은 램시마뿐이지만 2014년 1월 국내 허가를 받은 ‘허쥬마’, 지난해 11월 유럽에 허가를 신청한 ‘트룩시마’ 등도 조만간 상용화될 전망이다. 이외에도 다수의 바이오시밀러 후보 물질과 바이오신약 후보 물질을 개발 중이다.


셀트리온 관계자는 “바이오시밀러 분야에선 우리가 세계 선두”라며 “자리를 잡으면 신약개발에도 본격적으로 나설 예정”이라고 말했다.


제1회 한미 오픈이노베이션 포럼. /사진=뉴시스 이영환 기자
제1회 한미 오픈이노베이션 포럼. /사진=뉴시스 이영환 기자

◆한미약품, R&D 신화 창조

바이오시밀러업계에 셀트리온이 있다면 제약업계에는 한미약품이 있다. 최근 10년간 연구개발(R&D) 비용으로만 9000억원 이상을 쏟아 부으며 한때 “무모한 투자를 하고 있다”는 비아냥을 들었던 한미약품은 지난해 8조원대 기술수출 계약을 체결하며 R&D 신화를 창조했다.


특히 올무티닙은 지난해 12월 폐암세포의 성장 및 생존 관련 신호전달에 관여하는 변이형 EGFR(상피세포성장인자수용체)만을 선택적으로 억제하며 기존 폐암 치료제 투약 후 나타나는 내성 및 부작용을 극복한 3세대 내성표적 폐암신약으로 국내 개발 항암제 최초로 FDA의 혁신치료제로도 지정됐다.


한미약품이 지금까지 계약금으로 받은 금액만 7500억원가량이며 하반기부터는 수출한 기술들에 대한 마일스톤(단계별 기술료)도 받을 전망이다. 또한 임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시판이 이뤄지면 추가로 10% 이상의 로열티도 받는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1신약에 사활을 건 한미약품의 R&D 투자가 대박을 터트리며 그간 R&D에 소극적이던 경쟁사들도 R&D 투자를 대폭 늘리고 있다”며 “한미약품의 성공이 국내 제약업계의 분위기를 바꿔놨다”고 말했다.

◆규제의 그늘


일각에선 대기업집단에 대한 규제가 심한 한국에선 대기업이 퍼스트무버가 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퍼스트무버가 되기 위해선 기술-업계 간 융·복합을 통한 새로운 기술이나 시장 창출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기업은 기술력이 뛰어난 벤처나 중소기업과 인수합병(M&A)을 할 경우 당장 골목상권 침해, 대기업 독점 등의 비판과 함께 수십가지 규제의 적용대상이 된다. 


재계 관계자는 “규제라는 제약이 풀리지 않고 대기업의 다양한 사업 분야로의 확장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바뀌지 않는다면 대기업의 퍼스트무버 전환 시도는 자칫 퍼스트루저 양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4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