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에 사는 유모씨(남·35)는 2009년부터 최근까지 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로 살았다. 은행거래는커녕 통장조차 그의 이름으로 발급받지 못했다. 수년간 누나 명의의 체크카드를 이용했고 간단한 금융거래조차 누나의 지원이 필요했다. 유씨가 채무불이행자로 등록된 이유는 부모님의 욕심 때문이었다.


2000년대 초반 부동산 열기가 뜨거웠던 시기. 부모님은 유씨의 명의로 4층짜리 꼬마빌딩을 샀다. 건물가격은 10억원대였는데 유씨 가족이 보유한 현금은 1억원이 채 안됐다. 유씨의 부모님은 은행과 제2금융권, 지인에게 돈을 빌려 건물을 매입한 뒤 ‘여관’으로 전업했다. 당시 건설장비업에 근무한 유씨를 비롯해 그의 누나까지 월급의 70~90%를 대출이자로 냈다. 유씨는 그래도 만족했다. 여관이 잘 되고 매달 대출금을 갚으면 훗날 건물주가 될 것이란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사진제공=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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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08년 말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고 유씨의 건물가격은 반토막났다. 때마침 유씨는 직장을 잃었고 설상가상 겨울 한파로 여관의 보일러가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후 여관은 문을 닫기 일쑤였다. 수백만원의 보일러수리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출금이 밀리기 시작했고 지금껏 십여년간 채무불이행자로 살다가 최근 개인회생을 통해 악몽에서 벗어났다.

◆채무불이행자 100만명… 정부, 소매 걷었다

가계빚 1300조원 시대를 맞아 채무불이행자 등 금융 취약계층이 늘고 있다. 기준금리 연 1.25%의 초저금리 환경이 지속되면서 너도나도 금융회사의 문을 두드린 것. 잘 쓰고 잘 갚으면 문제되지 않지만 유씨처럼 무리하게 대출받거나 사업실패로 한 순간에 채무불이행자가 된 이들도 적지 않다.


민병두 더불어민주당 의원(동대문을)이 한국신용정보사로부터 자료를 받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올 4월 말 기준 금융채무불이행자는 102만명에 달했다. 연체금액은 130조원 규모다. 여기에 현재 대출빚을 제때 갚지 못하는 잠재적 채무불이행자까지 합하면 실질적인 부실규모는 더 많을 것으로 전망된다.

채무불이행자로 낙인 찍히면 대출거래는커녕 통장발급이나 예금이체 등 금융거래조차 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일부 기업에선 채무불이행자로 등록된 경우 취업에 제한을 두기도 한다. 빚에 허덕이고 경제적인 활동에서도 제한을 받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셈이다.


이들이 구제받을 길은 없는 것일까. 다행히 정부를 비롯해 금융당국, 금융회사 등 다양한 곳에서 취약계층과 저신용자를 돕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 운용 중이다. 채무불이행자의 신용회복을 돕는 신용회복위원회와 국민행복기금, 미소금융, 햇살론, 새희망홀씨, 두배로희망대출까지 취약계층이 도움받을 만한 곳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신용회복위원회를 통해 개인워크아웃을 신청하면 연체이자와 이자는 물론 일부 채권기관의 원금도 감면받을 수 있다. 빚 상환기간도 최대한 늘려 채무자가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매달 원금과 이자를 내도록 돕는다. 무엇보다 금융채무불이행자라는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다.


유씨는 “개인회생이 받아들여지면서 가장 기뻤던 것은 내 이름으로 은행통장을 발급받았던 것”이라며 “(개인회생 이후) 내 명의로 첫 통장을 만들 땐 눈물이 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금융거래 제한이 현시대에 얼마나 강력한 제재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랴. 중요한 점은 채무불이행자가 나오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현재 빚을 진 저신용자에 대한 구제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신용회복위원회를 비롯해 미소금융, 햇살론, 바꿔드림론 등이 그 대안정책으로 꼽힌다.

특히 정부가 오는 9월부터 미소금융과 햇살론, 바꿔드림론 등의 기능을 통합해 관리하는 서민금융진흥원을 출범키로 해 취약계층은 그나마 숨통이 트일 것으로 전망된다. 또 같은 기간 신용회복위원회도 법정기구로 새롭게 출범한다. 이른바 서민금융 컨트롤타워가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금융기관의 한 임원은 “모럴해저드(도덕적해이) 논란도 있지만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것은 정부가 해야 할 당연한 업무”라며 “가계빚이 사회적 문제로 더 확산되기 전에 다양한 방식으로 제도적 안전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잠재적 부실 예방… 중신용자도 껴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안감은 남는다. 빚으로 집을 샀거나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한 경우 당장은 신용등급이 높더라도 언제 어떻게 취약계층으로 떨어질지 알 수 없다. 불확실성 리스크가 상존하는 지금의 상황에선 취약계층 리스크를 현미경처럼 자세히 관리해도 부족하다는 게 전문가의 공통된 지적이다. 만약 중신용자들이 취약계층으로 떨어지면 우리 경제는 더욱 험난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중신용자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한 이유다.

금융당국은 이에 대한 대책도 마련 중이다. 우선 선보인 것이 중금리 대출상품인 ‘사잇돌대출’이다. 사잇돌대출은 은행문턱이 높아 저축은행이나 카드론을 이용해야 했던 중등급자를 위한 대출상품이다. 사회초년생, 연금수급자 등 상환능력이 있지만 대출이 어려운 4~7등급자가 대상이다. 금리는 연 6~10%대 수준으로 최대 2000만원까지 대출이 가능하다. 지난달 5일 출시돼 한달 만에 5000여건, 513억원의 자금이 공급될 만큼 인기가 높다. 특히 대출자 가운데 중신용자가 77.4%, 중위소득자가 72%에 달해 안정적인 공급이 이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사잇돌대출이) 빠르게 안착하고 있다”며 “앞으로 운용성과를 감안해 대출공급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 시중은행과 저축은행, P2P대출회사 등이 중신용자를 위한 다양한 대출상품을 속속 내놓는 등 중신용자 지원사격에 나섰다.

금융권 관계자는 “가계빚이 늘어나면 부실에 대한 우려도 커진다”며 “가계빚이 증가해도 연체율이 오르지 않거나 연체율이 소폭 상승하더라도 연체자가 다시 회생할 수 있는 안정적인 정책이 뒷받침된다면 빚은 오히려 내수를 살리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처럼 가계빚이 부실로 연결되지 않도록 이자 부담을 덜고 이들이 안전하게 대출빚을 상환할 수 있는 대책을 계속해서 내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서민금융 새출발-상] '사잇돌'로 신용 지원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4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