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낙산공원으로 들어서다
한양도성 해설기④ / 혜화문에서 광희문까지
허창무 한양도성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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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낙산구간에서 처음 마주하는 문은 ‘암문’(暗門)이다. 한자로는 ‘어두운 문’이라는 뜻이지만 실제 의미는 ‘숨겨진 문’ 또는 ‘비밀의 문’이다. 그래서 영어로 표기할 때 ‘Hidden Gate’라고 쓴다.
암문은 전쟁 중 적군 몰래 군수물자를 반입하거나 가까운 곳에 진을 친 적을 한밤중 기습공격하는 데 사용한 비밀의 문이다. 평상시에는 도성 안으로 물자를 들이기 위한 문으로 썼다. 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 사이에 8개 암문이 있고 이 중 낙산구간에 3개가 있다.
◆봉림대군과 홍덕이밭
낙산공원 안 놀이광장은 넓다. 성곽 쪽에는 정자가 있고 서쪽 경사진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홍덕(弘德)이밭’이 있다. 병자호란(1636년 12월~1637년 1월) 때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끌려갔다. 그때 홍덕이라는 궁녀가 따라가 시중을 들고 김치를 담갔다. 김치가 없는 곳이라 봉림대군에게는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도 훌륭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와 효종이 된 봉림대군은 볼모시절 김치 맛을 잊지 못해 낙산 자락의 밭을 홍덕에게 줬다. 배추를 기르고 김치를 담가오게 하기 위해서다. 주인공들은 사라졌지만 고사 속 땅은 그대로 남아 지난날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소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인 인조는 8년 만에 귀국한 세자를 왜 그토록 미워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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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성곽. /사진=서대웅 기자 |
소현세자는 당시 급변하는 한반도 주변 국제정세를 그 누구보다도 현명하게 판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이 병자호란으로 인해 청나라의 신하나라로 전락한 후에도 조정은 하릴없는 명분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소현세자는 볼모로 쓰라린 체험을 했음에도 명분보다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먼저 걱정했다. 그러기 위해선 청나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위정자들의 잘못으로 수십만 백성들이 머나먼 이국땅에 포로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당했다. 세자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동족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인조는 그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세자가 청나라의 앞잡이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욱 슬픈 건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의 사연이다. 그들에게 씌워진 것은 ‘환향녀’(還鄕女)라는 수치스런 멍에였고 수많은 여인이 자결을 택했다.
만약 인조반정이 실패해 광해군이 실각하지 않았다면 정묘호란도 병자호란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수많은 피로인과 환향녀의 희생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뼈저린 삼전도의 국치를 겪지 않았을 것이고 청나라와는 선린외교를 이어갔을 것이다.
◆타락산의 정상에서
오래 전 낙산은 천연의 숲이 아름답고 군데군데 모양 좋은 바위와 약수터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쌍봉낙타의 유방처럼 보이는 낙산 서쪽 산록의 약수터 일대는 쌍계동(雙溪洞)이라고 불렀다. 성현의 <용재총화>에서는 이곳을 삼청·인왕·백운·청학과 더불어 도성 안 5대 명승지로 꼽았다.
하지만 지금은 놀이광장 바로 위 낙산정으로 가는 길 옆 성벽이 잘렸고 도로가 놓였다. 성벽이 끊긴 곳에는 을씨년스러운 굴착흔적이 뚜렷하다. 문화재 보존인식이 없던 개발시대의 유산이다.
이렇게 큰 상처가 생긴 까닭은 1969년 김현옥 서울시장이 낙산 정상에 세운 낙산시민아파트 때문이다. 현재 옛 낙산시민아파트의 소방도로는 마을버스의 통로로 쓰인다. 성 밖 바로 아래 빈터에 버스정류장을 만들면 되는데도 사람이 살지 않은 성안으로 굳이 마을버스가 들어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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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망정. /사진=서대웅 기자 |
낙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40~50m쯤 내려오면 나무에 가려진 성 밖 성벽에 ‘좌룡정’(左龍亭)이라는 각자가 보인다. 이곳에 활터가 있었다는 증거다. 이밖에도 도성 안에는 여러 곳의 사정(射亭)이 있었다.
도성안의 5대 사정을 들면 사직동의 대송정(大松亭), 옥인동의 등룡정(登龍亭), 필운동의 등과정(登科亭), 누상동의 백호정(白虎亭), 삼청동의 운룡정(雲龍亭)이 모두 종로구에 있다.
왜 이렇게 많은 활터가 있었을까. 이는 선비가 배워야 할 여섯가지 중요한 교육과목에 활쏘기가 포함됐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육예란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인데 예는 예절, 악은 음악, 사는 활쏘기, 어는 말 타기, 서는 글씨 쓰기, 수는 수학을 말한다.
테니스장을 지나 낙산정에 이르면 샛길 안쪽 깊이 들어선 큼지막한 정자가 고즈넉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돌계단을 올라서면 공터에 등나무시렁이 있고 층층이 뻗어 한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이 생긴다.
낙산정 언덕에서 시내를 바라보면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갈 만큼 사방이 탁 트였다. 서쪽으로는 인왕산, 북쪽으로는 백악산, 남쪽으로는 목멱산이 거칠 것 없이 보인다.
◆생태도시로 거듭나길
내려다보면 서울 도심은 녹지대가 꽤 많다. 한양의 도성 안은 모두 궁궐이고 종묘고 사직단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도성 안을 기준으로 보면 런던의 하이드파크나 뉴욕의 센트럴파크가 부럽지 않은 푸른 도시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병원 뒤가 종묘다. 종묘 위 감사원 동쪽으로 동궐, 즉 창덕궁과 창경궁이 자리 잡았다. 동궐 건너 백악산 밑 청와대 앞에는 경복궁이 있다. 그리고 좀 더 멀리 인왕산 밑에 사직단이 있다.
녹지대는 백악산으로부터 동궐을 지나 종묘를 거쳐 도성 안을 누비고 남산으로 이어진다. 그 사이에 세운상가가 있어 잠시 끊어지지만 낙산정에서 바라보면 녹지가 단절된 부분은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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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세운상가를 철거하고 남산에 이르는 녹지대를 복원하면 도성 안 생태축이 다시 형성돼 서울은 세계 유수의 생태도시가 될 것이다.
남산, 즉 목멱산은 꼭대기에 N서울타워를 두고 서쪽으로 누에머리(蠶頭峰)를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신사를 짓기 위해 서쪽 끝을 훼손했다는 누에머리는 지금도 그때의 상흔이 쓰라린 듯 아스라한 침묵 속에 도성을 내려다보고 있다. 인왕산의 치마바위는 오늘도 단경왕후의 슬픈 전설을 아련히 들려준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7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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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창무 한양도성해설가
자본시장과 기업을 취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