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한양도성의 총 길이는 5만9500척으로 약 18.63km에 달한다. 2009년 서울성곽장기종합기본계획을 세울 당시 잔존성벽은 13.16km, 멸실성벽은 5.47km였다. 거리가 꽤 길어 낙산구간, 목멱산(남산)구간, 인왕산구간, 백악산(북악산)구간 등 내사산의 4개 구간으로 나눠 해설한다.

낙산구간은 혜화문에서 광희문까지, 목멱산구간은 광희문에서 숭례문까지, 인왕산구간은 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마지막 백악산구간은 창의문에서 혜화문까지다.


낙산은 내사산 중에서 가장 낮은 산이지만 해발 125m에 불과해 조금 높은 언덕쯤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가장 높은 백악산이 342m, 그 다음 높은 인왕산이 338m, 목멱산이 262m다.

낙산성곽. /사진=서대웅 기자
낙산성곽. /사진=서대웅 기자

그런데 내사산이 뭘까. 왕국에서 통치의 중심이 되는 궁궐을 법궁(法宮) 또는 정궁(正宮)이라고 한다. 궁궐을 지을 때 궁궐을 보호하는 성을 쌓는다. 내사산이란 그 성을 잇는 사방의 산이다. 그중 제일 먼저 정하는 산이 주산(主山)인데 법궁은 주산을 배경으로 정남향으로 짓는다. 그러니까 주산을 먼저 정한 다음 법궁을 짓는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풍수지리설로는 주산을 북 현무(玄武)라 하고 법궁의 남쪽 산을 남 주작(朱雀)이라 하며 동쪽 산을 좌 청룡(靑龍), 서쪽 산을 우 백호(白虎)라 한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기준으로 보면 북 현무는 백악산, 남 주작은 목멱산, 좌 청룡은 낙산, 우 백호는 인왕산이다. 이 네 산의 정상을 이어 쌓은 것이 한양도성이다.

여기서 오방색(五方色)도 알아볼 수 있다. 북쪽은 검은색, 남쪽은 붉은색, 좌측은 청색, 우측은 백색이고 중앙은 왕을 의미하는 황색이다. 하지만 조선의 왕은 중국 황제가 입는 노란 황룡포를 입지 못하고 빨간 곤룡포를 입었다.

◆사실상 대문 역할을 한 혜화문

낙산구간의 출발점인 혜화문(惠化門)은 속칭 ‘동소문’으로 도성 축성 초년도인 1396년 세워졌다. 현재 북쪽으로는 옛 서울시장 공관의 높다란 성곽담장이 있고 남쪽 경계에는 창경궁로(2010년 동소문로에서 바뀜)가 있다. 그것은 원래 현재 위치 바로 아래 창경궁로 한가운데에 있었다. 현재 건물은 1994년 위치를 변경해 복원한 모조품이다.


지금 혜화문이 있는 언덕은 원래 건너편 가톨릭대학 언덕과 연결됐었다. 하지만 1928년 남소문이라는 광희문의 문루와 함께 혜화문의 문루(門樓)도 퇴락해 없어지고 홍예문만 남았다가 그것마저 1939년 혜화동에서 돈암동까지 전찻길을 놓으면서 철거됐다. 이 문루는 조선 중기 영조20년(1744)에도 무너져 다시 세운 적이 있다(영조 20년 8월6일 실록기사). 따라서

혜화문은 북대문이라는 숙정문과 동대문이라는 흥인지문 사이에 있어 옛 경원가도(京元街道)의 지름길에 놓인 문이다. 여진족 사신도 이 문을 통해 입성했다. 숙정문이나 흥인지문이 있지만 지름길인 이 문을 통과하는 게 편했을 것이다.

혜화문. /사진=서대웅 기자
혜화문. /사진=서대웅 기자

숙정문은 한여름 가뭄에 기우제 지낼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1년 내내 닫혀있었다. 음기가 세다는 속설 때문이다. 실제로 숙정문 밖 성북동 골짜기에 드넓은 뽕나무밭이 있었는데 할 일 없는 왕족이나 귀족의 자제 또는 도성 밖 불량배들이 뽕나무밭에서 일하는 부녀자들을 희롱하고 풍기를 문란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숙정문은 닫혔고 혜화문이 북대문 구실을 했다.

당시 사대문 수비군사는 30명이었고 소문 수비대는 20명이었지만 혜화문은 소문임에도 30명의 수비군사가 있었다고 한다.


혜화문의 원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 그런데 1~2년 새 선대의 과부 왕비가 3명이나 나오는 바람에 세종 즉위 초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거처했던 수강궁을 성종 14년(1483) 증축해 창경궁으로 개명하고 그 동쪽 대문을 홍화문이라고 지었다. 이에 중종(1511)은 이름이 같은 두 문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동소문의 이름을 혜화문으로 고쳤다.
[한양도성] 내사산에서 가장 낮은 낙산

혜화문 홍예 천장에는 봉황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그 사연은 이렇다. 조선시대 혜화문 밖은 평야였다. 드넓은 농경지에 시도 때도 없이 참새, 직박구리, 까치, 까마귀, 동고비 등 온갖 들새가 몰려와 농사를 망쳤다. 농업이 주된 산업인 만큼 농사를 망치면 세금을 거둘 수 없어 새들의 왕이라는 봉황을 그려 넣은 것이다. 날개가 붉은 것은 수컷인 봉이고 날개가 푸른 것은 암컷인 황으로 그림은 암수 한쌍을 이룬다. 아울러 해당 지역에 지네가 많아 천적인 ‘닭’ 대신 봉황을 그려 넣었다는 창의문 천장 그림의 일화가 떠오른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6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