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골목] 그리운 추억도 피어나다
김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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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운 골목길 풍경이 사라진지 오래다. 몇몇 남아 있는 예스러운 골목길이 추억을 그리는 이들의 마음을 달래줄 뿐이다. 현대인들에게 골목길은 어떤 의미일까. 고층 아파트와 빌딩 숲에 둘러싸인 답답한 세상, 그 안에 숨겨진 보석 같은 추억 속 골목길 풍경을 <머니S>가 들여다봤다.<편집자주>
붓질 한번으로 골목이 달라졌다. 담벼락에 꽃이 피고 행인의 발걸음이 한편의 시에 멈춘다. 어둡고 음산했던 골목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졌고 젊은이들도 골목을 찾는다.
국내에서 ‘공공미술’이 활성화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대부분은 지자체가 도시환경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기획했다. 골목길 벽화 그리기는 대표적인 공공미술 사례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벽화 그리기가 진행된 곳은 약 100개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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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계양초등학교 상야분교에서 벽화도색 작업하는 한국우편사업진흥원 직원 및 자원봉사자. /사진=뉴시스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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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동 벽화골목. /사진=김노향 기자 |
◆도심 골목에 등장한 청년예술가들
서울 종로의 빌딩숲에서 을지로 방향으로 20분을 걸으면 작고 낡은 철물점이 즐비한 산림동이 나타난다. 청계천을 앞에 두고 지하철 을지로3가역과 을지로4가역 사이에 자리 잡은 이 동네는 1970년대 산업화의 흔적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지난 1월16일 정오. 평일 한낮임에도 골목 안으로 들어가기가 망설여질 정도로 산림동 일대는 컴컴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시끄러운 기계소리가 골목 안을 메우고 곳곳에는 담배를 피우는 상인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골목 안 깊숙이 들어서자 뜻하지 않게 아기자기한 벽화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귀여운 고양이 그림과 함께 산림동 지도를 만화로 표현한 예술작품이다.
최창식 중구청장은 2015년 산림동의 빈 점포를 청년들에게 임대해 예술활동을 펼치도록 지원했다. 최 구청장은 “낙후된 도심이 청년들의 예술활동으로 활기가 생기고 새로워졌다”고 말했다.
청년들은 벽화 그리기 외에도 을지로에 관한 사진과 기록을 전시하고 공연, 교육, 이동경로의 개선 등 주민의 불편을 연구하는 데도 매진한다. 청년들은 을지로 골목길이 사라지기 전 기록으로 남긴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고 구청 관계자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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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현마을 벽화를 그리는 주민들. /사진제공=안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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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구 방학역 일대에서 트릭아트 벽화를 그리고 있는 시민들. /사진=뉴시스 DB |
◆노인마을에 그려진 샛노란 꽃그림
경기도 안양시와 광명시의 경계에는 ‘호현마을’이라는 작은 동네가 있다. 마을 초입에는 공장단지와 도살장이 있어 마치 외부세상과 단절된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난 1월17일 낮 안양역에서 택시를 타고 호현마을에 도착하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80년대로 날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래된 집들과 녹슨 철제문, 그리고 몇시간째 눈에 띈 사람이라곤 70~80대로 추정되는 노인 한사람뿐이다. 실제로 안양시에 따르면 호현마을은 주민 200명 남짓이 살며 대부분이 어르신이다.
하지만 골목 안 길을 따라 구불구불 걷다 보면 이와는 대조적인 풍경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낡은 담장에 어울리지 않는 샛노란 벽화들이 곳곳에 그려져 공기마저 따뜻하게 만드는 느낌이다. 색 바랜 대문 옆에는 김춘수의 시 ‘꽃’이 쓰여있다.
안양시는 2013~2014년 ‘호현마을 생활환경 복지마을 조성’ 사업을 기획했다. 당시 이곳은 지리적으로 외진 데다 노인층 비율이 높아 환경이 점점 열악해지는 상황이었다. 폐기물처리장 등 환경위해시설과 서해안고속도로에서 발생하는 소음, 도살장 악취 등으로 생활환경이 취약한 지역으로 꼽혔다. 안양시가 호현마을 프로젝트를 추진한 것은 이런 생활환경을 개선해 복지격차를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안양시는 주민협의회를 구성했고 주민과 공무원, 전문가가 모여 17개 주택의 지붕철거와 개량작업을 지원했다. 이뿐만 아니라 도시가스 설치와 사업비 지원 등으로 실질적인 생활환경을 개선시켰다.
안양시의 프로젝트 후 호현마을은 명소가 됐다. 이윤섭 안양시 환경보전과 주무관은 “주민들이 마을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화합하고 공동체의식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쓰레기 문제나 도시가스 문제 등 주민들 스스로 해결하기 힘들었던 숙원사업도 성사시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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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동 벽화골목. /사진=김노향 기자 |
◆시민 품으로 돌아온 일본인 마을
지난 1월18일 서울 용산구 후암동의 남산 아래 골목길에 한무리의 중국인관광객이 찾아왔다. 담장의 벽화를 배경으로 서로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자 한명이 “이곳 벽화골목이 유명하다고 해 찾아왔다”고 말했다.
후암동 벽화골목은 인근 보성여고 학생과 서울대 건축학과 학생, 그리고 주민들이 손수 그린 예술작품이다. 갖가지 꽃과 나무, 이국적인 마을풍경을 담은 벽화는 후암동 속 또 다른 세계 같다. 2013년 용산구는 ‘범죄예방 환경설계’ 사업을 추진, 학교나 어린이집 주변 골목을 벽화로 꾸몄다.
이곳은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큰 장소다. 골목에서 만난 한 주민은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가까웠던 탓에 후암동은 주로 일본인들의 주거지였고 한국인들은 동대문 등지로 밀려났다”며 “그래서 이 동네에는 일본식 주택이 많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미술과 알록달록 동심의 힘으로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던 후암동 골목길은 다시 서울시민의 명소가 됐다. 추운 겨울 영하의 날씨에도 푸른 잎새가 마을 담장은 물론 주민들의 마음속에도 피어오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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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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