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전차 드나든 동대문, 왜 철거되지 않았나
한양도성 해설기 ⑨ / 혜화문에서 광희문까지
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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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전차(電車)가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배경은 조선황실의 결정 때문이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에 자주 다녔는데 이때마다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어 이를 절약하려고 전차를 도입했다. 전차는 고종 36년(1899) 5월 돈의문에서 청량리까지 최초의 단선 선로를 따라 동대문 홍예 안으로 드나들었다. 이처럼 최초의 전차는 외세의 강압이 아니라 조선과 미국 전차회사와 공동투자로 이뤄졌다.
이때만 해도 동대문 성벽은 헐리지 않았다. 하지만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일제의 강압에 퇴위하고 일본인들이 대한제국 각 부처의 차관으로 임명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특히 순종 즉위년(1907) 내부차관에 임명된 기노우치 주시로가 성벽처리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성벽처리위원회는 1907년 9월부터 숭례문 북쪽 성벽을 헐기 시작했고 숭례문 밖 남지 연못도 매립했다. 같은 해 10월16일 일본 다이쇼 황태자의 한양 방문이 숭례문 성벽 철거의 직접적인 이유로 꼽힌다. 일본 황태자의 체면상 홍예 안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동대문 홍예 안으로 운행하던 전차는 접촉사고가 잦아 좌우 성벽을 헐어 우회하도록 했다. 이때가 1908년 3월이다. 같은 해 9월에는 소의문의 성벽도 철거됐다. 광희문 양쪽의 성벽은 왕십리선 전차가 설치되면서 헐렸고 혜화문 성벽을 허문 것은 혜화동에서 돈암동까지 전찻길을 개설하기 위해서였다.
흥인지문 광장 바로 옆 동대문호텔 앞에는 ‘경성궤도회사터’ 표지석이 있다. 거기에는 “1930년부터 1961년까지 뚝섬과 광나루까지 경성궤도회사가 경영하던 궤도전차의 시발지. 이 협궤전차는 승객 및 물자수송, 교외 나들이의 중요한 교통시설이었다”고 적혀있다. 지금의 지하철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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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사진제공=서울역사박물관 |
◆흥인지문이 숭례문과 함께 보존된 이유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 단장 나카이 기타로는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철거된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안타까워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성문을 없애는 것은 너무나 큰 문화적 손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맥을 총동원해 하세가와 요세미치 사령관과 하야시 콘스케 일본공사를 찾아갔으나 철거론자인 이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오히려 막무가내로 두 성문을 보존해야 할 근거를 대라고 다그치기만 했다. 이후 갑자기 기발한 착상이 떠올라 두 사람을 다시 찾아갔다.
“숭례문은 임진년 조선 정벌 때 가토 기요마사가 입성한 문입니다. 흥인지문으로는 고니시 유키나카가 쳐들어왔지요. 일본 승전의 관문이 아닙니까! 이것만으로도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남아야 할 가치는 충분합니다.”
그의 말을 듣고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라면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남길만 하네요. 두 문을 없애면 조선 정벌의 이야기가 사라지겠어요.” 그의 설득이 주효한 순간이었다.
흥인지문과 숭례문은 이렇게 보존될 수 있었다. 광희문은 일본 사신들이 동평관으로 드나들었던 문이어서 보존됐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와 아무 인연이 없었던 돈의문과 소의문, 혜화문 등은 철거됐다. 일본의 장군들이 지나갔다는 이유로 보존되긴 했지만 어쨌든 국적을 초월해 문화재를 보호하겠다는 한 문화인의 집념은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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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시장. /사진제공=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가 |
◆동대문시장과 그 주변의 역사적 유적
동대문시장은 1905년 7월5일 우리나라 최초로 대한제국 한성부에 등록된 민영 도시상설시장이다. 이를테면 1호 전통시장인 셈이다. 원래 흥인지문 주변에는 예전부터 이현 또는 배오개시장이라는 난전이 형성됐다. 그러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일제가 주권을 장악하면서 경제침탈도 노골화돼 혼란을 겪었다.
종로상인들은 일본의 경제침략을 막고자 1904년부터 시장설립에 착수했다. 1905년 11월에는 동대문시장을 관리할 목적으로 고위 관리였던 김종한과 종로의 거상이며 두산의 창업주인 박승직, 장두현 등 3인의 발기인이 토지와 현금 10만원을 출연,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때부터 동대문시장의 이름은 광장시장으로 바뀌었다. 시장의 원래 위치가 광교와 장교 사이에 있어서 광장시장으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광장시장은 전차정거장 옆에 위치하고 뚝섬과 광나루벌의 야채를 실어 나르던 기동차의 시발점과도 가까워서 큰 시장으로 발전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구호물자나 미군부대에서 불법적으로 흘러나오는 외제품을 거래하면서 구호물자시장이라고도 불렸다. 그곳은 차츰 한복원단, 양복지, 양장지, 커튼, 침구류 등을 취급하는 직물도매상들의 시장으로 명성을 쌓았다. 최근엔 직물과 의류시장은 동대문종합시장으로 옮겨가고 광장시장은 마약김밥, 닭요리, 생선회, 매운탕, 아구찜, 원조순대, 빈대떡 등 다양한 먹거리로 유명해졌다.
동대문 일대의 상권은 한국전쟁 이후 광장시장을 기점으로 계속 동쪽으로 확장했다. 현재는 청계천을 따라 광장시장, 방산시장, 동대문종합시장, 평화시장이 늘어섰다. 이 거대한 시장지역은 세계적인 의류·패션산업의 중심지로 꼽힌다.
1950년대 말에는 정치깡패 이정재의 득세로 시장상인들이 곤욕을 치렀지만 그 역시 군사쿠데타 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재봉사이자 재단사였던 전태일이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개선과 인권을 부르짖으며 분신자살했던 곳이기도 하다.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될 때 청계천 6가 전태일다리(옛 버들다리) 위에 전태일 동상을 세웠다. 임옥상 화백의 작품이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8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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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가
자본시장과 기업을 취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