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S토리] 유명무실한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제’
김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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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현장의 공사대금이나 임금체불을 막기 위한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제’가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한 지 오래다. 중간 하도급업체가 도산하며 공사대금을 가로채는 일이 비일비재한 가운데 최하위 하청업체들은 지급보증을 받아도 실제로는 보증금을 떼이는 경우가 숱하다. 심지어 법적 예외조항을 빌미로 보증서 자체를 발급받지 못하는 경우가 80%에 달해 사실상 법이 존재 이유를 잃은 상황이다.
◆대기업 특혜 ‘예외조항’
올 초 공정거래위원회는 건설업계의 하도급대금 지급보증 실태를 집중조사하기로 했다. 현행 건설산업기본법과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은 원청업체가 하도급대금을 지불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건설공제조합 등 보증기관이 보증수수료를 받고 보증금을 대신 지급하도록 한다. 영세한 하청업체의 자금난과 연쇄부도를 막기 위한 장치다.
문제는 이런 제도적 장치가 있음에도 하청업체들이 공사대금을 받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라는 점이다. 지난해 전국건설노조 조사에 따르면 2013~2015년 하청업체 10곳 중 8곳은 보증서를 아예 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보증서 미발급 사유는 원청과 하청 간 합의가 46.6%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원청업체가 일방적으로 보증서 발급을 거부하는 경우도 33.4%에 달했다.
이렇게 보증서 발급률이 낮은 것은 하도급거래법 시행령에 지급보증 의무를 면제해주는 ‘예외조항’이 있어서다. 예외조항은 ▲공사금액 1건당 1000만원 이하 ▲원청업체의 신용평가등급 회사채 A0·기업어음 A2+ 이상 ▲발주자·원청업체·하청업체 간 직접지급 합의 ▲정부가 정한 지급관리시스템을 이용하는 경우 등에 적용된다.
전국건설노조 관계자는 “신용평가 예외조항은 대기업건설사가 법적책임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연세대학교가 2014년 발행한 논문 ‘건설하도급대금 지급보증제도의 개선방안 연구’에서도 이런 신용평가 면제제도의 단점을 지적했다. 신용도가 높은 건설사도 부도 가능성이 있는 데다 채무불이행 위험이 큰 건설현장에서 하청업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면제대상을 축소하거나 삭제해야 한다는 것.
◆고의적 파산 시 감시장치 부재
실제로 최근 경기도 소사-원시 복선전철 현장에서는 중간 하도급업체의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신청으로 수십억원대 공사대금이 체불됐다. 원청업체인 대우건설이 하도급업체 대남토건에 공사대금을 지급했으나 다시 하청을 받은 자재업체 등이 돈을 떼이면서 줄도산 위기에 놓였다. 대남토건 직원들은 임금은 물론 퇴직금마저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 현장은 지난해 4월에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현대건설과 하도급계약을 체결한 정암이앤씨가 기업회생절차를 신청, 공사가 중단되고 하청업체들이 피해를 입었다.
대남토건 직원들은 박남춘 대표이사가 법을 악용해 계획적인 파산을 내고 임금과 퇴직금을 체불했다며 지난달 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탄원서에 따르면 박 대표는 현장마다 30억원 이상의 공사대금을 착복하고 부동산 등을 처분하거나 가족 명의로 변경했다. 심지어 공장부지를 담보로 은행대출을 받고 회사이름을 변경해 사업을 지속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대우건설은 하청업체에 40% 보상안을 제시했으나 합의에 실패했으며 현대건설의 경우 보상을 하지 않았다. 대우건설 관계자는 “발주자나 원청업체가 공사대금을 정상적으로 지급해도 2~3차 하청업체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사고가 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하청업체 대부분이 영세한 건설사라 도의적 책임을 지는 것”이라며 “부도를 낸 대남토건도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는 재무제표상 건실한 기업이었기 때문에 자금난을 예측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하청업체들은 대기업건설사인 원청업체에 책임이 있다는 입장이다. 소사-원시 현장의 한 하청업체 관계자는 “중간 하도급업체가 공사대금을 밀리는 등 자금난이 시작된 후에도 공사를 중단하지 않고 또 다른 하청업체에 재수주를 주는데도 감시와 제재가 이뤄지지 않아 정보가 더 취약한 영세건설사들은 최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정부는 공사대금을 체불한 업체에 공공공사 입찰제한 등의 제재조치를 가했지만 실효성이 낮다. 하도급계약 적정성을 심사하는 대상이 대규모 공사에 그쳐서다. 전문가들은 체불 위험이 있는 경우 원청업체가 하도급업체를 바꾸거나 특별관리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또한 현행법상 처벌수위가 체불 횟수와 관계없이 영업정지 2개월이나 과징금 4000만원으로 낮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하도급 직불 반대하는 대기업들
건설업계에 만연한 체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해 ‘하도급대금 직불 확대방안’을 발표했으나 업계 반발에 부딪혔다. 사적자치의 원칙을 훼손하고 중간 하도급업체의 자금난으로 체불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공사대금 체불을 실질적으로 근절하려면 ‘임금 지급보증제’나 ‘기계대여 지급보증제’의 도입과 실효성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재희 전국건설노조 교육선전실장도 “건설노동자에게 임금 직불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경우 연방정부가 발주하는 10만달러 이상의 건설공사의 원청업체는 이행보증과 지급보증을 해야 한다. 기술자뿐만 아니라 자재공급업체와 장비대여업체 모두 공사대금 지급을 보호받는다. 즉 원청업체와 직접 계약하지 않은 재하청업체나 자재·장비 서비스업체도 지급보증의 대상이다.
우리 정부도 미국의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제를 벤치마킹한 ‘포괄 지급보증제’를 운영하고 있으나 이 역시 최저가 공공공사 중 일정 낙찰률 미만의 공사에 한정해 활성화되지 못한 상황이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8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대기업 특혜 ‘예외조항’
올 초 공정거래위원회는 건설업계의 하도급대금 지급보증 실태를 집중조사하기로 했다. 현행 건설산업기본법과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은 원청업체가 하도급대금을 지불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건설공제조합 등 보증기관이 보증수수료를 받고 보증금을 대신 지급하도록 한다. 영세한 하청업체의 자금난과 연쇄부도를 막기 위한 장치다.
문제는 이런 제도적 장치가 있음에도 하청업체들이 공사대금을 받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라는 점이다. 지난해 전국건설노조 조사에 따르면 2013~2015년 하청업체 10곳 중 8곳은 보증서를 아예 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보증서 미발급 사유는 원청과 하청 간 합의가 46.6%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원청업체가 일방적으로 보증서 발급을 거부하는 경우도 33.4%에 달했다.
이렇게 보증서 발급률이 낮은 것은 하도급거래법 시행령에 지급보증 의무를 면제해주는 ‘예외조항’이 있어서다. 예외조항은 ▲공사금액 1건당 1000만원 이하 ▲원청업체의 신용평가등급 회사채 A0·기업어음 A2+ 이상 ▲발주자·원청업체·하청업체 간 직접지급 합의 ▲정부가 정한 지급관리시스템을 이용하는 경우 등에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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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원시 복선전철을 짓는 경기도 시흥시. /사진=뉴스1 DB |
전국건설노조 관계자는 “신용평가 예외조항은 대기업건설사가 법적책임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연세대학교가 2014년 발행한 논문 ‘건설하도급대금 지급보증제도의 개선방안 연구’에서도 이런 신용평가 면제제도의 단점을 지적했다. 신용도가 높은 건설사도 부도 가능성이 있는 데다 채무불이행 위험이 큰 건설현장에서 하청업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면제대상을 축소하거나 삭제해야 한다는 것.
◆고의적 파산 시 감시장치 부재
실제로 최근 경기도 소사-원시 복선전철 현장에서는 중간 하도급업체의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신청으로 수십억원대 공사대금이 체불됐다. 원청업체인 대우건설이 하도급업체 대남토건에 공사대금을 지급했으나 다시 하청을 받은 자재업체 등이 돈을 떼이면서 줄도산 위기에 놓였다. 대남토건 직원들은 임금은 물론 퇴직금마저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 현장은 지난해 4월에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현대건설과 하도급계약을 체결한 정암이앤씨가 기업회생절차를 신청, 공사가 중단되고 하청업체들이 피해를 입었다.
대남토건 직원들은 박남춘 대표이사가 법을 악용해 계획적인 파산을 내고 임금과 퇴직금을 체불했다며 지난달 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탄원서에 따르면 박 대표는 현장마다 30억원 이상의 공사대금을 착복하고 부동산 등을 처분하거나 가족 명의로 변경했다. 심지어 공장부지를 담보로 은행대출을 받고 회사이름을 변경해 사업을 지속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대우건설은 하청업체에 40% 보상안을 제시했으나 합의에 실패했으며 현대건설의 경우 보상을 하지 않았다. 대우건설 관계자는 “발주자나 원청업체가 공사대금을 정상적으로 지급해도 2~3차 하청업체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사고가 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하청업체 대부분이 영세한 건설사라 도의적 책임을 지는 것”이라며 “부도를 낸 대남토건도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는 재무제표상 건실한 기업이었기 때문에 자금난을 예측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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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에 대해 하청업체들은 대기업건설사인 원청업체에 책임이 있다는 입장이다. 소사-원시 현장의 한 하청업체 관계자는 “중간 하도급업체가 공사대금을 밀리는 등 자금난이 시작된 후에도 공사를 중단하지 않고 또 다른 하청업체에 재수주를 주는데도 감시와 제재가 이뤄지지 않아 정보가 더 취약한 영세건설사들은 최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정부는 공사대금을 체불한 업체에 공공공사 입찰제한 등의 제재조치를 가했지만 실효성이 낮다. 하도급계약 적정성을 심사하는 대상이 대규모 공사에 그쳐서다. 전문가들은 체불 위험이 있는 경우 원청업체가 하도급업체를 바꾸거나 특별관리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또한 현행법상 처벌수위가 체불 횟수와 관계없이 영업정지 2개월이나 과징금 4000만원으로 낮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하도급 직불 반대하는 대기업들
건설업계에 만연한 체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해 ‘하도급대금 직불 확대방안’을 발표했으나 업계 반발에 부딪혔다. 사적자치의 원칙을 훼손하고 중간 하도급업체의 자금난으로 체불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공사대금 체불을 실질적으로 근절하려면 ‘임금 지급보증제’나 ‘기계대여 지급보증제’의 도입과 실효성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재희 전국건설노조 교육선전실장도 “건설노동자에게 임금 직불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경우 연방정부가 발주하는 10만달러 이상의 건설공사의 원청업체는 이행보증과 지급보증을 해야 한다. 기술자뿐만 아니라 자재공급업체와 장비대여업체 모두 공사대금 지급을 보호받는다. 즉 원청업체와 직접 계약하지 않은 재하청업체나 자재·장비 서비스업체도 지급보증의 대상이다.
우리 정부도 미국의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제를 벤치마킹한 ‘포괄 지급보증제’를 운영하고 있으나 이 역시 최저가 공공공사 중 일정 낙찰률 미만의 공사에 한정해 활성화되지 못한 상황이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8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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