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겜S] ‘크런치모드’에 죽어가는 개발자들
박흥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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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회사 개발팀에서 게임그래픽디자이너로 근무 중인 A씨(35·남)는 3살배기 아이를 둔 가장이다. A씨는 올 3분기로 예정된 게임 출시일정을 맞추기 위해 최근 야근과 주말 출근을 반복하고 있다. 그는 아이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눈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고 이제는 얼굴도 아련하다고 하소연한다.
게임업계가 ‘크런치모드’ 논란으로 뜨겁다. 고용노동부는 3~4월 게임업계 근로감독 결과를 지난 5월21일 발표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근로자 3250명 가운데 63.3%에 달하는 2057명이 주당 12시간으로 정해진 연장근로 한도를 평균 6시간 초과했다.
아울러 근로자들은 지급받아야 할 연장근로수당과 건강검진도 받지 못하고 퇴직금도 적게 수령하는 등 열악한 근무환경에 처한 것으로 드러났다. 노동부는 게임업계가 집중근무·초과근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등 근로시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장시간근로가 발생한 것으로 분석했다.
◆크런치모드, 왜 생겼을까
크런치모드는 게임 출시 전 완성도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실시하는 집중근무 형태를 가리키는 업계 용어다. 크런치모드에 대한 논란은 이미 오래전부터 꾸준하게 제기됐다. 1990년대 한국 게임산업의 태동기를 겪은 ‘게임 1세대’들은 부족한 자본과 인력으로 게임을 개발했다. 그들에게 잦은 야근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업계의 분위기가 20여년이 흐른 현재에 이르러서는 업계의 ‘문화’로 자리 잡은 것이다.
최근에는 게임의 플랫폼이 PC에서 모바일로 옮겨가면서 크런치모드가 더 가혹해졌다. 모바일게임은 PC게임보다 수명이 짧다. 게임의 ‘생명연장’을 위해서는 꾸준한 업데이트가 필수적이다. 그만큼 개발자들이 휴식과 개인여가를 잃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국만의 ‘빨리빨리’ 문화도 크런치모드를 부추긴다. 한국의 게임개발 일정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촉박한 경우가 많다. 게임업계 한 관계자는 “한국 기업들의 게임개발 일정은 상상을 초월한다”며 “해외개발사가 4~5년 걸릴 일정을 한국은 2~3년 안에 해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물론 그만큼 보상과 투자가 이어지면 감내할 수 있겠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개발자들의 열정만 착취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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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미지투데이 |
지난 4월 위메이드아이오가 7개월 크런치모드 논란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계획을 백지화했다. 이 크런치모드의 원안은 직원들의 평일 근무시간은 오전 10시에서 오후 9시까지, 어린이날·추석 등 일부 공휴일을 제외한 휴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근무해야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식사시간은 30분으로 제한되며 추가근무시간에는 수당이 지급되지만 게임이 정해진 기일에 출시되지 않으면 이 수당을 반납해야하는 조건이었다.
◆개발자 목조르는 크런치모드
이보다 앞서 지난해에는 엔씨소프트와 넷마블의 게임개발직군 사원들이 잇따라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해당 업체들은 근로자의 사망과 과로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게임업계는 이처럼 살인적인 스케줄 강요가 납기일을 맞추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게임은 납기가 생명이라 정해진 기일을 맞추기 위해 통상 2개월은 크런치모드를 해야 한다는 것.
여기에 중국 기업들의 영향으로 단가 인하 압박이 거세다고 토로하는 실정이다. 게임업계 한 관계자는 “상응하는 보상이 있으면 크런치모드를 수용하겠다는 사람도 더러 있다”며 “하지만 최근에는 중국업체들이 게임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면서 복지처우 개선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제도·인식 개선해야
열악한 근로환경 속에 게임개발자들의 이탈도 가속화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게임개발 종사자수는 2012년 5만2466명에서 2015년 3만5445명으로 급감했다. 업체당 평균인원도 2012년 54.8명에서 2015년 44명으로 줄었다.
업계에 따르면 초과근무에 지친 국내 게임인력들이 2~3배의 연봉을 받으며 중국 게임개발사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가 많다. 인력유출은 대형게임사보다 중견게임업체에서 두드러진다. 일정한 매출이 보장되는 대형게임사와 달리 중견게임업체는 지속적으로 신작을 출시해야 기업을 경영할 수 있어서다. 따라서 개발자들은 몇달간 퇴근하지 못하고 크런치모드에 시달리는 실정이다. 중견게임업체 소속 한 개발자는 “주변에 중국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중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종종 있다”며 “입사절차는 물론 문화도 다르지만 잘 적응한다면 훨씬 쾌적하고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는 중국으로 떠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크런치모드 논쟁의 해결책으로 제도와 인식을 대대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조언한다. 중국으로 인력유출이 가속된다면 국내 게임업체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크런치모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국내 게임업계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며 “그래도 최근 업계의 문화를 바꾸자는 움직임이 있어 한가닥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정부도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정형우 노동부 근로기준정책관은 “게임산업의 특수성이 있더라도 법정근로시간은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며 “근로조건 위반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업장은 엄정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업계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게임업체에서 게임기획을 맡은 한 관계자는 “게임은 종합예술이라 불릴 만큼 예술, 창작과 관련된 요소가 많이 들어간다”며 “근무시간을 획일적으로 정하고 그 시간 안에 결과물을 도출해내라는 식의 문화와 제도는 게임산업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창작활동은 유연한 제도와 상호 신뢰가 뒷받침될 때 양질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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