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럽고 일도 안잡히고 현실도피 하고 싶고 불안하고 그래요.”
“상사병입니다.”
“에? 사랑에 빠진 건가요?”
“아뇨. 직장‘상사’가 주는 병.”


한컷 한컷이 주옥같다. 한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일명 ‘사이다 에세이’, 그림왕양치기의〈실어증입니다, 일하기 싫어증〉중 한 장면이다.


/사진=임한별 기자
/사진=임한별 기자


“보고서가 개판이네”라는 상사의 말에 “개처럼 일만 시키니까요”라고 응수하고 야근을 시키며 ‘보람’을 싸들고 온 사장에게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라는 돌직구를 날린다.

이 책에 열광하는 이들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월급쟁이들. 잦은 야근과 주말 근무, 상사를 위한 감정노동, 그리고 박봉에 시달리는 한국 직장인의 삶과 그대로 겹쳐서다. 오죽하면 직장인에게 ‘약이 된다’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 진지충 거부… 돌직구 작가의 ‘처방전’

이 범상치 않은 그림을 그리는 주인공은 ‘그림왕양치기’란 필명으로 소시민의 이야기를 꾸준히 그리는 양경수 작가(33). ‘진지충’(모든 일에 지나치게 진지한 태도로 반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속어)을 온몸으로 거부한다는 그의 글은 가볍지만 현실성 강한 돌직구에 가깝다. 서울 영등포 작업실에서 처음 만나던 날, 그가 말했다.


“어떤 의미를 주려고 그린 그림은 아니에요. 제 책은 사실 20분이면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거든요. 책으로 비판의식을 부여한다기보다 보자마자 0.5초 만에 웃을 수 있는 말초적인 웃음을 노렸어요. 요즘엔 가벼운 웃음을 저평가하고 의미를 안두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본능에서 나오는 웃음이 많아져야 세상이 살 만해진다고 생각해요.”

그는 현웃(현장웃음)을 이끌어낼 만한 공감은 언제나 사람 사는 풍경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그가 직장인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도 치열하고 열정적이었던 현장의 추억이 있어서다.


/사진제공=양경수 작가
/사진제공=양경수 작가


스무살, 2만원을 들고 집을 나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하던 시절이 있었다. 운전기사부터 시작해 벽화 그리기, 인테리어 창업까지…. 시급 3000원을 받기도 했고 돈을 떼이는 일도 있었다. 소위 말하는 갑질과 부조리가 만연한 현장에서의 삶이 지금의 그를 만든 원천이다.

“많은 작가가 그렇겠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니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그러면서 틈틈이 지금의 한컷짜리 그림을 그렸죠. 낮엔 일하고 밤에는 작업하고 스무살 이후로 늘 그랬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땐 진짜 힘들었거든요. 한편으론 씁쓸하지만 지나고보니 그 경험이 원동력이 된 거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산 적은 없었지만 늘 ‘을’의 위치에 있던 그였기에 직장인 친구들이 털어놓은 애환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가 마음먹고 자신의 SNS에 직장 스토리 컷을 그리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원래는 아기그림이나 찌질한(?) 사랑 이야기를 한컷짜리 그림으로 연재했었죠. 그러다 주변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친구들끼리 술 한잔하면 매번 듣는 게 직장이야기, 직장 상사 욕이다 보니 이걸 그리면 재밌겠다 싶었죠. 정말 말도 안되는 일들이 많더라구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림이 업데이트될 때마다 반응이 폭발적이었죠. 그렇게 알려지기 시작해 일본인 작가 책에 삽화 표지로 참여하게 됐고 본격적인 활동으로 이어졌어요.”

최근 그의 인기는 가히 최고라 할 수 있다. 지난 8월까지 들어온 광고만 300여개. 여기에 수백건의 강의와 기업, 드라마 등과의 컬래버래이션 요청도 끊이지 않는다. 그의 그림으로 패키지를 만든 빵과 술안주, 복권까지 세상에 나왔다. 최근엔 보건복지부 암예방 홍보대사 자리까지 꿰찼다. 지난해 말 출간된 <실어증입니다, 일하기 싫어증>은 7쇄를 찍었고 2만부가 팔려나갔다. 

“사실 사람들이 이 정도로 열광할 줄 몰랐어요. 한편으론 ‘직장인들이 생각보다 더 힘들게 사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제 그림을 보면서 공감하고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며 스스로 위로를 받는다고 하더라구요.”


/사진=임한별 기자
/사진=임한별 기자


◆ 불교미술작가의 ‘남들과 다른 삶’

한컷 만화로 먼저 알려졌지만 그의 본업은 불교를 재해석하는 현대미술 작가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불교미술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2015 불교박람회' 우수콘텐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올 초엔 네덜란드 국립세계문화박물관 '더붓다' 전에 초청돼 전시회를 열었다.

“어머님이 탱화를 그리셨고 아버지는 단청 그리는 일을 하셨어요. 아버지는 당신이 하던 일을 제가 물려받을 거라 믿고 계셨는데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거든요. 정해진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싫어요. 불교미술을 미뤄두고 한컷 그림을 그리며 외부활동을 하고 있지만 조급하지 않은 것도 그래서예요.”


/사진제공=양경수 작가
/사진제공=양경수 작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속 명대사. “남들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오늘도 나 남들과 같은 삶을 사네”처럼 특별하게 살고 싶어 똑같이 사는 게 우리네 인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때 그때 상황에 맞는 현실을 열심히 살면 결국 그게 자신만의 인생이고 역사가 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그에게 그림은 이제 일을 넘어선 그 무엇이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이고 그가 만나는 음악이거나 예술이거나 혹은 옛 우리네 삶의 비밀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하나의 길을 선택했다. 그 길은 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는 일이다.

앞으로 그는 조금 더 드러나지 않는 직업군에 집중할 계획이다. 방송 현장의 스태프들과 새벽 첫차 속 청소용역인들의 삶…. 누군가 하고 있음에도 누가 하는지는 모르는, 주목받지 못하는 직업군의 스토리를 세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아마 기존처럼 추상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삶을 그린 거랑은 전혀 다른 변화를 줄 거예요. 남들의 삶을 다루다 보니 제약이 많고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휴재기간은 당분간 길어질 것 같지만요. <시즌2>에서 다루는 얘기들은 웃음코드가 그전과는 다를 수 있어요. 많은 사람이 보지 않는다고 해도 그 자체로 의미는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제 일이 가장 행복해지는 길 아닐까요.”


/사진제공=양경수 작가
/사진제공=양경수 작가


☞ 본 기사는 <머니S> 추석합본호(제507호·제50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