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어떻게 식민지배와 6·25전쟁으로 인한 자산파괴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과 민주화를 달성했을까. 삼성전자는 어떻게 반도체와 휴대폰에서 세계 1위가 됐고 방탄소년단은 어떻게 빌보드차트 1위에 올라 K-Pop 열풍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을까.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한 것으로 당연시됐던 일이 기적처럼 현실이 되는 배경엔 무엇이 있을까. ‘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에선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우리의 인문학적 바탕을 찾아본다. -편집자-
임진왜란의 아픈 기억을 되새긴 동래읍성전투 재연 모습 /사진=뉴스1 DB
임진왜란의 아픈 기억을 되새긴 동래읍성전투 재연 모습 /사진=뉴스1 DB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반드시 조선을 침략할 것입니다. 그것에 대비해야 합니다.” (정사 황윤길·서인)
“일본은 침략하지 않을 겁니다. 전쟁준비로 민심을 어지럽혀서는 안됩니다.” (부사 김성일·동인)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1592년 4월)이 일어나기 1년여 전인 1591년 2월.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과 쓸데없는 일을 벌여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1590년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정사와 부사, 그들이 일본에서 보고 느꼈던 것은 같았을 터인데도 실제 보고는 정반대였다. 당시 조정에서 동인 세력이 강했던 터라 침략에 대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왜란이 일어나며 조선은 추풍낙엽처럼 무너졌다.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뽑아놓은 것이 그나마 천우신조라고나 할까.

국가존망이 달린 외침을 앞두고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을까. 시계바늘을 임진왜란 2년쯤 전으로 돌려보면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엄청난 비밀이 드러난다. 1589년부터 1591년까지 3년 동안 조선 선비 1000여명을 ‘집단학살’한 ‘기축사화’가 그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해 조선침략 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에 대비하기는커녕 당파 싸움이 한창이었고 유사시 지혜를 모아 함께 대비해야 할 지식인을 대대적으로 처단하며 스스로 무장해제한 일이 벌어졌다.

◆선비 1000여명 집단학살한 기축사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불과 3년 전인 1589년 이른바 ‘정여립 모반사건’을 다룬 기축옥사가 벌어졌다. 정여립(1546~1589)이 ▲천하공물(天下公物)론과 왕위선양제의 대동이념을 표방하며 반상차별 없는 새 나라를 세울 목적으로 대동계를 조직하고 ▲이씨 왕조가 망하고 정씨 왕조가 일어난다는 ‘목자망전읍흥’(木子亡奠邑興)의 역성혁명적 정씨왕조론과 ‘전주왕기설’의 참언을 퍼트려 ▲조선왕조를 무너뜨리려는 모반을 꾀했으며 ▲거사 사실을 자살로 확인시켰다는 혐의였다.


정여립의 ‘거사계획’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주장도 많다. ▲정여립의 활동무대는 호남(전주와 진안 등)인데 율곡의 문인이 많은 황해도에서 고변이 이뤄졌고 ▲대동계라는 조직이 엉성하고 역모 발각 시에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으며 ▲참설의 유포에서부터 모반 사건 전 과정에 정철과 송익필 등이 개입해 조작한 흔적이 농후하고 ▲거사를 계획했다는 물증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선조실록 등)는 정여립 모반을 사실로 판단했고 3년 동안 이어진 기축사화로 1000여명이 휘말려 죽임을 당했다. 그렇다면 모반 모의와 거사계획은 있었을까. 당시 시대상황을 살펴보자.


당시는 지구 온도가 떨어지는 소빙기(1490~1750)로 대기근과 전염병이 잇따라 발생해 민심이 흉흉했다. 15세기 말 연산군(재위 1494~1506) 때의 홍길동(허균이 지은 소설 주인공은 洪吉童인 반면 洪吉同은 실제인물이다)에 이어 16세기 중후반 명종(재위 1545~1567) 때 임꺽정이 등장하는 등 현실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면서 새로운 삶을 가져다 줄 위인을 기다리는 시대였다.

‘정여립 모반사건’은 이런 상황에서 발생했다. 정여립은 선조3년(1570년) 식년문과에 을과2등(급제자 중 갑과는 1~3등, 을과는 4~10등)에 급제했다. 1581년 정언(사간원의 정6품)이 됐고 1584년 홍문관 수찬(정5품)으로 승진했다가 사직하고 고향인 전주로 내려갔다. 1년 뒤인 1585년 다시 수찬이 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가 독서와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그는 벼슬살이할 때 당대의 유명한 학자인 이이, 성혼, 송익필 등과 교류할 정도로 잘 나갔다.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 “정여립은 많이 배웠고 재주가 있다. 남을 업신여기는 병통이 있기는 하지만, 쓸 만한 인물인데…” 하며 그를 선조에게 추천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선조는 “정여립은 칭찬하는 자도 헐뜯는 자도 없으니 어디 쓸 만한 자라고 하겠는가”라며 등용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정여립은 선조에 불만을 가졌고 고향에서 대동계를 조직한 것이 모반 사건으로 엮이는 단초를 제공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서양 계몽철학자보다 앞선 혁명사상가

정여립이 혹독하게 처벌받게 된 정치사상은 무엇일까. 선조실록의 정여립 관련 기록을 보면 그는 공자가 <예기>에서 밝힌 대동사상을 근거로 천하를 사유물로 여기며 대대로 세습하는 세습군주를 비판하고 왕위선양론을 폈다.

또 이데올로기화 된 ‘불사이군’론을 이윤의 ‘하사비군’론으로 비판하면서 공자의 대동이념적 ‘군주민선론’과 결합하더니 전통적 임금제를 벗어나 ‘선출왕제’, 공화제로 나아가도록 했다. 공자의 이상국가론을 바탕으로 ‘공화주의’를 도출할 정도로 천재적 사상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여립은 나아가 나라의 무사태평을 위해 노비와 그 일족의 요역을 모두 경감하거나 면제하고 추쇄(도망갈 경우 끝까지 쫓아가 붙잡아 오는 것)를 폐지하며 공사노비와 서얼의 앞길을 막는 모든 금법을 없앨 것을 공약했다. 당시 백성들은 세습군주제와 세습신분제를 인정치 않는 그의 공약을 왁자하게 앞다퉈 전파함으로써 강한 지지를 보냈다.

그의 이 같은 사상은 서양 계몽철학자들이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 근대화를 위한 혁명적 계몽운동을 일으킨 것보다 150년이나 앞선 것이다.

정여립은 ▲백성 가운데서 민심을 얻은 현자를 선출해 왕위를 물려주고 ▲신분차별이 없으며 ▲장정과 남자는 할 일과 일자리가 있고 여자는 시집갈 데가 있는 복지가 이뤄지는 이상적 공자의 대동세계와 당시 조선현실을 짜깁기(패치워크)해서 혁명적 정치사상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의 사상은 지식인과 백성들의 마음에 살아남아 최제우의 동학과 고종의 구본신참론으로 이어졌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51호(2018년 8월1~7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