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클립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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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갈수록 거칠어진다. 묻지마 폭행과 살인이 횡행하고 도로 곳곳에서 벌어지는 보복운전, 동물학대 등 각종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분노조절장애라는 정신질환이 도사리고 있다. 최근 4년간 분노조절장애 판정을 받은 환자는 20% 가까이 증가했다. <머니S>가 화를 참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살펴봤다. <편집자주>

[분노조절장애에 멍드는 폭력사회] ② 분노조절장애를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


화를 참지 못하는 병 ‘분노조절장애’.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말이다. 최근 언론이나 SNS에서 자주 거론되기 때문이다. 운전 중 다른 자동차가 자신을 추월하며 차선을 바꿨다는 이유로 뒤쫒아 무차별 폭행한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분노조절장애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강박증, 좌절감, 압박감 등으로 발생하는 신경정신과 질환이다. 정확한 진단을 거쳐 약물과 운동치료 처방을 받는다면 완치에 가까운 치료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많은 사람이 방치된 채 타인에게 물적·정신적 피해를 입히고 스스로는 전과자로 전락한다. 이들은 왜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거나 받지 못하는 걸까.


최근 분노조절장애로 인한 각종 폭력·사건사고가 자주 발생한다. 분노조절장애는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신경정신과의 치료가 반드시 필요하다. 발병 초기에는 환자 스스로 순간적인 분노를 억제할 수 있지만 장기간 방치하면 증상이 악화돼 조절이 불가능하게 된다.


이런 장기·만성질환자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다. 이들은 실제로 폭행과 살인 등 강력범죄를 저지르면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분노조절장애로 진단받은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치료 의지가 있더라도 병원을 찾지 못한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또다른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은 치료만 잘 받으면 정상적인 ‘사회’의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지만 뿌리 깊은 ‘오해와 편견’이 그들을 가로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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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코드 진료 경력자에 보험사 불이익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강모씨(25·서울 성북구)는 “어느 순간 잠이 잘 오지 않아 병원을 찾았다”며 “우울증 진단을 받아 주기적으로 약 처방을 받고 있는데 사람들이 무슨 약이냐고 물어보면 섣불리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정신과 약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다른 핑계를 댄다”고 덧붙였다.


#분노조절장애와 우울증 진단을 받은 장모씨(29·서울 동대문구)는 모 대학병원 인턴으로 내과 전문의를 지망한다. 그는 학부 시절 정신과 수업도 많이 들었지만 정신과 치료에 대한 거부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장씨는 “대학 입학 이후 혼자 생활한 지 7~8년 됐다. 과도한 업무에 혼자 사는 생활이 길어지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며 “이런 와중에 정신과 진단을 받았지만 동기들에게 알리지 않고 숨겼다. 아무리 같이 공부한 의사라도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면 선입견을 갖고 대할 것 같아서 내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가 발간한 ‘2016 정신질환실태역학조사’에 따르면 국내 성인 중 정신건강 문제로 의사, 정신건강의학과의사, 사회복지사 등에게 상담한 사례는 전체 9.6%에 불과하다.


이는 우리나라의 정신과 질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해외 선진국은 정신과 질환도 내과나 외과질환과 마찬가지의 '병'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상담과 치료가 활발하다.

하지만 정신과 질환에 대한 우리나라의 편견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제도적 문제도 적극적인 정신과 치료를 가로막는다. 정신과 진료를 뜻하는 F코드(정신질환자 분류)를 받을 경우 일부 보험 가입 등이 거절된다. 정신과 진료 이력이 ‘주홍글씨’로 작용하는 것.


이러다 보니 편법도 등장했다. 정신과 진료 후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비급여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현금으로 병원비를 결제하는 것. 정신과 진료의 문턱이 그만큼 높다는 얘기다.

김석선 이화여자대학교 간호학부 교수는 “정신질환 치료는 빠를수록 효과와 예후가 좋다”며 “암처럼 정신질환도 조기에 치료받는 것이 중요한데 국내에서는 정신질환에 걸렸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편견 탓에 치료받기를 꺼려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제도적 장치 마련한 해외 선진국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후진성을 드러낸다. 국내 1호 정신병원인 청량리 정신병원의 경우 부정적 인식이 경영악화로 이어져 결국 지난 3월 폐원했다.

일각에서는 폐원을 막기 위해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 개선 캠페인 등을 벌여왔지만 반향은 미미했다. 청량리 정신병원 폐원은 국내 정신질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반면 해외에서는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변화와 제도적·사회적 포용 정책이 효과를 얻고 있다.

미국의 경우 정신건강 질환자를 위한 핫라인이 개설돼 있다. 각 질환별로 전화 버튼 한번만 누르면 상담사에게 연결된다. 이는 사회적 편견과 오해로 섣불리 정신과병원을 찾지 못하는 잠재환자를 제도권으로 끌어내기 위한 서비스다. 

또한 호주, 태국 등에서는 지역별로 커뮤니티를 만들어 이웃 중에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 없는지 정보를 공유한다. 이를 통해 실제 환자들이 치료를 받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영국에서는 2007년부터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타임 투 체인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했다.

사회적 편견이 더 큰 질환

<바울의 가시-나는 조현병 환자다>의 저자 이관형씨는 자신이 정신질환의 일종인 조현병 환자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혔다. 그는 한국은 '정신질환자는 범죄자'라는 잘못된 인식에 사로잡힌 비이성적 국가라고 지적한다.

이씨는 “(정신질환 자) 모두가 잠재적인 범죄자나 사이코패스가 아니다”며 “일반인 중에도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고 다른 종류의 장애인들도 착한 이와 나쁜 이가 있듯이 정신질환 자도 마찬가지로 착하고 선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죄를 짓고 악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신질환 자체가 환자들을 절대 악이나 절대 선으로 만드는 건 아니라고 본다”며 “선입견과 편견으로 위험하고 악한 존재로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상처를 받고 사회 부적응자가 되거나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혀 범죄를 저질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씨는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따뜻하게 감싸고 관심과 사랑을 준다면 누구라도 세상의 선한 존재로서 아름답고 따뜻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제560호(2018년 10월3~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