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준의 스포츠톡] 전쟁보다 치열한 '엘 클라시코'와 유럽 4대리그 ‘더비 매치'…
김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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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엘 클라시코'는 언제나 세계 축구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사진=로이터 |
지난 10년 간 7번의 챔피언스리그를 나눠가지며 유럽축구의 양강으로 등극한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숙명의 라이벌전을 앞두고 있다. 이번 ‘엘 클라시코’는 이적과 부상을 이유로 세계 최고의 선수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가 빠졌으나 루카 모드리치, 가레스 베일, 세르히오 라모스, 루이스 수아레즈, 필리페 쿠티뉴, 이반 라키티치 등 여전히 세계적인 스타들이 즐비한 매치업이다.
현재 공식경기 기준으로 레알이 95승 49무 92패로 상대전적에서 약간 앞서는 등 언제나 전쟁을 방불케 하는 경기를 펼치는 두 팀이다. 레알과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최고 클럽 자리를 놓고 대결하는 양대 산맥이지만 역사적으로도 양립할 수 없는 두 지역 카스티야와 카탈루냐를 대표하는 팀이어서 엘 클라시코는 총성 없는 전쟁으로써 그 치열함을 이어 갔다.
이 두 팀 외에도 100년이 넘는 축구 역사가 진행되면서 잉글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등 4대 리그를 포함한 유럽 각지에서는 엘 클라시코 못지않은 치열한 라이벌전인 ‘더비 매치’들이 자리 잡았다. 본래 더비 매치는 19세기 영국의 소도시 ‘더비’에서 유래해 같은 도시를 연고로 둔 팀들 간의 대결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이후 의미가 확장되어 스포츠에서 펼쳐지는 라이벌전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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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산 실(주세페 메아차)에서 열린 세리에A 9라운드 AC밀란과 인테르 간의 경기 현장. 밀라노 더비는 언제나 전쟁같은 접전이 벌어진다./ 사진=로이터 |
1. 이탈리아 세리에 A 밀라노 더비
AC밀란과 인테르의 밀라노 더비는 약 20년 전만 해도 엘 클라시코 이상으로 세계 축구 팬들에게 주목을 받은 매치다. 로쏘네리(이탈리아어로 붉은색과 검은색을 상징, AC밀란의 유니폼)와 네라주리(검은색과 파란색을 상징, 인테르의 유니폼)를 입은 파울로 말디니, 호나우두 등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맞대결을 펼쳤던 경기는 언제나 눈길을 사로잡는 ‘빅 매치’였다. 두 팀이 밀라노에 가져온 챔피언스리그 트로피만 10개에 이를 정도로 AC밀란과 인테르는 세계적인 명문이었다.
그러나 2010년 이후 세대교체에 실패한 두 팀은 현재 우승은 커녕 단골이었던 챔피언스리그 무대에도 발붙이지 못하는 등 세계를 제패했던 과거의 영광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이고 있다.
AC밀란과 인테르는 탄생 배경부터 갈등이 내재돼 있었다. 1899년 패션의 중심지이자 이탈리아 제2의 공업도시인 밀라노에서 잉글랜드의 부영사였던 알프레도 에드워드의 주도 하에 AC밀란의 전신인 밀란 ‘크리켓 앤 풋볼 팀’이 탄생했다. 창단 후 AC밀란은 1901, 1906, 1907시즌 리그를 제패하면서 정상급 팀으로 성장했지만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탈리아인과 잉글랜드인만 받아들이는 구단 정책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에 일부 사람들이 AC밀란을 나와 ‘국제적인’이라는 뜻을 가진 ‘인테르나치오날레(Internazionale)’ 즉 인테르를 새롭게 창단했다. 인테르는 창단 2년 만에 우승을 달성하는 등 성공적인 역사를 시작했으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위시한 극우세력 ‘파시스트’들은 외국인들을 기용하는 인테르를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여겼다.
따라서 인테르는 우니오네 스포르티보 밀라네세(Unione Sportivo Milanese)와 강제로 합병되면서 클럽 명이 암브로시아나(Ambrosiana)로 바뀌기도 했으나 팬들은 강압 속에서도 ‘인테르’를 외치며 팀을 지켰다.
1962-1963 시즌 AC밀란이 밀라노 클럽 역사상 최초로 유러피언컵(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60년대를 지배한 팀은 인테르였다.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창조자 ‘산드로 마촐라’, 역대 최고의 풀백으로 꼽히는 ‘지아친토 파케티’ 등과 함께 1962-1963년 스쿠테토(세리에A 리그 우승을 상징하는 방패)를 차지했다.
이어 1963-64, 1964-65 시즌 연속으로 유러피언컵을 차지하면서 전 세계에 ‘카테나치오’(5백을 중심으로 한 빗장수비)의 강력함을 알렸다. 당시 사람들은 무적에 가까웠던 네라주리에 ‘그란데 인테르’(위대한 인테르)라는 명칭을 붙였다.
라이벌 AC밀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86년 로쏘네리의 구단주로 부임한 베를루스코니는 당시 세계적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 ‘오렌지 삼총사’와 카를로 안첼로티 등을 영입하며 최고의 선수진을 구축했다. 그리고 이들을 지휘할 감독으로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아리고 사키를 임명했다.
사키는 우려와 달리 철저한 지역방어와 전방 압박이 결합된 4-4-2 포메이션 토털사커를 구사하며 챔피언스리그 2연패, 리그 58경기 연속 무패 등을 기록해 AC밀란의 황금기 ‘밀란 제너레이션’을 열어젖혔다. 이후 한동안 AC밀란이 인테르의 성적을 압도했다. 그러나 ‘칼치오폴리’(승부 조작)에 연루된 유벤투스와 AC밀란이 2부 리그로 강등된 사이 세리에A에서 독주체제를 구축한 인테르는 조제 무리뉴 감독과 함께 2009-2010시즌 이탈리아 클럽 역사상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하며 AC밀란과 ‘업적 경쟁’에서 균형을 맞췄다.
한편 두 팀이 같은 살림살이를 시작한 것은 1947년이다. AC밀란은 1926년 수용 인원 2만6000명 규모의 경기장 ‘산 시로’를 건설해 단독으로 사용했으나 1947년부터 인테르와 공동으로 운영하면서 두 팀은 동일한 홈구장을 이용하게 됐다.
‘산 시로’의 명칭이 바뀐 건 1980년이다. 30년대 인테르의 암흑기에 혜성같이 등장해 348경기 동안 241골을 넣으며 세리에A 3회 우승, 코파 이탈리아 1회 우승을 이끈 주세페 메아차가 1979년 사망했다. 인테르 측은 구장을 팀의 전설에게 헌정하기로 했고 이때부터 산 시로는 ‘주세페 메아차 스타디오’로 불렸다. 하지만 AC밀란 입장에서는 타 팀의 전설을 구장 이름으로 사용하는 일이 달갑지 않았을 터. 지금까지도 산 시로라는 이름으로 홈 구장을 부르고 있다.
2. 독일 분데스리가 레비어 더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루르 지역에 연고를 둔 샬케 04와 도르트문트 간의 경기를 지칭한다. 세계적으로도 지나친 열성으로 유명한 팬들을 보유한 두 팀의 더비매치가 열릴 때면 지역 경찰들이 대거 동원돼 이들을 제지하기도 한다.
두 팀이 각각 연고로 두고 있는 겔젠키르헨와 도르트문트는 불과 30km 거리에 떨어져 있다. 밀접한 만큼 두 팀의 팬들은 충돌이 잦았고 치열한 대립 구도를 만들었는데 샬케와 도르트문트의 상대 전적도 현재까지 샬케 기준으로 68승 45무 60패로 팽팽하다.
하지만 1925년 첫 레비어 더비가 펼처진 당시에는 도르트문트는 샬케의 적수가 결코 되지 못했다. 독일 국가대표 출신이 즐비한 샬케가 당시 너무 강했다. 이후 샬케는 30년대 독일 챔피언십(현재의 분데스리가)을 연이어 제패하면서 독일 최고의 클럽으로 성장했으며 도르트문트와의 상대전적은 자연스럽게 더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50년대 들어서 양상은 180도 바뀌었다. 전성기가 한참 지난 샬케는 전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됐고 도르트문트는 1955-1956 시즌 구단 역사상 최초로 독일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함과 동시에 2연패를 달성하며 독일 축구계의 신흥 강호로 자리 잡았다. 아울러 1965-1966시즌에는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을 차지하며 독일 구단 최초로 유럽 대항전에서 우승하는 영광을 누린다.
해당 시즌 샬케가 도르트문트에 0-7이라는 역사적인 대패를 당했고 같은해 11월에도 2-6으로 패하면서 두 팀의 위상은 완전히 한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그러나 샬케는 라이벌에게는 질 수 없다는 의지로 이후 9경기의 더비 매치에서 6승을 거두는 기염을 토했다.
두 팀은 세계무대에서도 마치 라이벌을 의식한 듯이 성과를 냈다. 오랜 침체기를 벗어내고 1991년 분데스리가 우승을 달성한 샬케는 1996-1997시즌 인테르를 꺾고 UEFA컵(현 유로파 컵)을 차지하면서 팀의 부활을 선언했다.
이에 자극을 받았는지 도르트문트는 당대 독일 최고의 미드필더 안드레아스 뮐러와 독일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로 꼽히는 마티아스 잠머 등을 앞세워 유벤투스를 상대로 3-1로 완승을 거두고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한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끝나고 도르트문트 서포터즈는 우승 축제와 함께 ‘루르, 루르’라 노래를 불렀다. 더 높은 위상의 유럽 대항전에서 도르트문트가 우승했으니 본인들의 팀이 루르를 대표하는 팀이라는 뜻이었다.
AC밀란과 인테르의 밀라노 더비는 약 20년 전만 해도 엘 클라시코 이상으로 세계 축구 팬들에게 주목을 받은 매치다. 로쏘네리(이탈리아어로 붉은색과 검은색을 상징, AC밀란의 유니폼)와 네라주리(검은색과 파란색을 상징, 인테르의 유니폼)를 입은 파울로 말디니, 호나우두 등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맞대결을 펼쳤던 경기는 언제나 눈길을 사로잡는 ‘빅 매치’였다. 두 팀이 밀라노에 가져온 챔피언스리그 트로피만 10개에 이를 정도로 AC밀란과 인테르는 세계적인 명문이었다.
그러나 2010년 이후 세대교체에 실패한 두 팀은 현재 우승은 커녕 단골이었던 챔피언스리그 무대에도 발붙이지 못하는 등 세계를 제패했던 과거의 영광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이고 있다.
AC밀란과 인테르는 탄생 배경부터 갈등이 내재돼 있었다. 1899년 패션의 중심지이자 이탈리아 제2의 공업도시인 밀라노에서 잉글랜드의 부영사였던 알프레도 에드워드의 주도 하에 AC밀란의 전신인 밀란 ‘크리켓 앤 풋볼 팀’이 탄생했다. 창단 후 AC밀란은 1901, 1906, 1907시즌 리그를 제패하면서 정상급 팀으로 성장했지만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탈리아인과 잉글랜드인만 받아들이는 구단 정책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에 일부 사람들이 AC밀란을 나와 ‘국제적인’이라는 뜻을 가진 ‘인테르나치오날레(Internazionale)’ 즉 인테르를 새롭게 창단했다. 인테르는 창단 2년 만에 우승을 달성하는 등 성공적인 역사를 시작했으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위시한 극우세력 ‘파시스트’들은 외국인들을 기용하는 인테르를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여겼다.
따라서 인테르는 우니오네 스포르티보 밀라네세(Unione Sportivo Milanese)와 강제로 합병되면서 클럽 명이 암브로시아나(Ambrosiana)로 바뀌기도 했으나 팬들은 강압 속에서도 ‘인테르’를 외치며 팀을 지켰다.
1962-1963 시즌 AC밀란이 밀라노 클럽 역사상 최초로 유러피언컵(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60년대를 지배한 팀은 인테르였다.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창조자 ‘산드로 마촐라’, 역대 최고의 풀백으로 꼽히는 ‘지아친토 파케티’ 등과 함께 1962-1963년 스쿠테토(세리에A 리그 우승을 상징하는 방패)를 차지했다.
이어 1963-64, 1964-65 시즌 연속으로 유러피언컵을 차지하면서 전 세계에 ‘카테나치오’(5백을 중심으로 한 빗장수비)의 강력함을 알렸다. 당시 사람들은 무적에 가까웠던 네라주리에 ‘그란데 인테르’(위대한 인테르)라는 명칭을 붙였다.
라이벌 AC밀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86년 로쏘네리의 구단주로 부임한 베를루스코니는 당시 세계적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 ‘오렌지 삼총사’와 카를로 안첼로티 등을 영입하며 최고의 선수진을 구축했다. 그리고 이들을 지휘할 감독으로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아리고 사키를 임명했다.
사키는 우려와 달리 철저한 지역방어와 전방 압박이 결합된 4-4-2 포메이션 토털사커를 구사하며 챔피언스리그 2연패, 리그 58경기 연속 무패 등을 기록해 AC밀란의 황금기 ‘밀란 제너레이션’을 열어젖혔다. 이후 한동안 AC밀란이 인테르의 성적을 압도했다. 그러나 ‘칼치오폴리’(승부 조작)에 연루된 유벤투스와 AC밀란이 2부 리그로 강등된 사이 세리에A에서 독주체제를 구축한 인테르는 조제 무리뉴 감독과 함께 2009-2010시즌 이탈리아 클럽 역사상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하며 AC밀란과 ‘업적 경쟁’에서 균형을 맞췄다.
한편 두 팀이 같은 살림살이를 시작한 것은 1947년이다. AC밀란은 1926년 수용 인원 2만6000명 규모의 경기장 ‘산 시로’를 건설해 단독으로 사용했으나 1947년부터 인테르와 공동으로 운영하면서 두 팀은 동일한 홈구장을 이용하게 됐다.
‘산 시로’의 명칭이 바뀐 건 1980년이다. 30년대 인테르의 암흑기에 혜성같이 등장해 348경기 동안 241골을 넣으며 세리에A 3회 우승, 코파 이탈리아 1회 우승을 이끈 주세페 메아차가 1979년 사망했다. 인테르 측은 구장을 팀의 전설에게 헌정하기로 했고 이때부터 산 시로는 ‘주세페 메아차 스타디오’로 불렸다. 하지만 AC밀란 입장에서는 타 팀의 전설을 구장 이름으로 사용하는 일이 달갑지 않았을 터. 지금까지도 산 시로라는 이름으로 홈 구장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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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8만명을 수용 가능한 독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홈구장 지그날 이두나 파크. 샬케04와의 '레비어 더비'가 열리는 날이면 8만 대군의 함성은 더욱 커진다./사진=로이터 |
2. 독일 분데스리가 레비어 더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루르 지역에 연고를 둔 샬케 04와 도르트문트 간의 경기를 지칭한다. 세계적으로도 지나친 열성으로 유명한 팬들을 보유한 두 팀의 더비매치가 열릴 때면 지역 경찰들이 대거 동원돼 이들을 제지하기도 한다.
두 팀이 각각 연고로 두고 있는 겔젠키르헨와 도르트문트는 불과 30km 거리에 떨어져 있다. 밀접한 만큼 두 팀의 팬들은 충돌이 잦았고 치열한 대립 구도를 만들었는데 샬케와 도르트문트의 상대 전적도 현재까지 샬케 기준으로 68승 45무 60패로 팽팽하다.
하지만 1925년 첫 레비어 더비가 펼처진 당시에는 도르트문트는 샬케의 적수가 결코 되지 못했다. 독일 국가대표 출신이 즐비한 샬케가 당시 너무 강했다. 이후 샬케는 30년대 독일 챔피언십(현재의 분데스리가)을 연이어 제패하면서 독일 최고의 클럽으로 성장했으며 도르트문트와의 상대전적은 자연스럽게 더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50년대 들어서 양상은 180도 바뀌었다. 전성기가 한참 지난 샬케는 전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됐고 도르트문트는 1955-1956 시즌 구단 역사상 최초로 독일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함과 동시에 2연패를 달성하며 독일 축구계의 신흥 강호로 자리 잡았다. 아울러 1965-1966시즌에는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을 차지하며 독일 구단 최초로 유럽 대항전에서 우승하는 영광을 누린다.
해당 시즌 샬케가 도르트문트에 0-7이라는 역사적인 대패를 당했고 같은해 11월에도 2-6으로 패하면서 두 팀의 위상은 완전히 한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그러나 샬케는 라이벌에게는 질 수 없다는 의지로 이후 9경기의 더비 매치에서 6승을 거두는 기염을 토했다.
두 팀은 세계무대에서도 마치 라이벌을 의식한 듯이 성과를 냈다. 오랜 침체기를 벗어내고 1991년 분데스리가 우승을 달성한 샬케는 1996-1997시즌 인테르를 꺾고 UEFA컵(현 유로파 컵)을 차지하면서 팀의 부활을 선언했다.
이에 자극을 받았는지 도르트문트는 당대 독일 최고의 미드필더 안드레아스 뮐러와 독일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로 꼽히는 마티아스 잠머 등을 앞세워 유벤투스를 상대로 3-1로 완승을 거두고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한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끝나고 도르트문트 서포터즈는 우승 축제와 함께 ‘루르, 루르’라 노래를 불렀다. 더 높은 위상의 유럽 대항전에서 도르트문트가 우승했으니 본인들의 팀이 루르를 대표하는 팀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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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에 열린 2017-2018 프리미어리그 30라운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 간라이벌전 경기 현장. 노스웨스트 더비는 잉글랜드 최고의 팀을 다투는 두 명문 간의 맞대결이다. /사진=로이터 |
3.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노스웨스트 더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전설적인 수비수 출신으로 현재 축구 해설가로 활동 중인 게리 네빌은 최근 영국 매체 ‘스카이스포츠’에 기고한 칼럼에서 “라이벌인 맨체스터 시티와 리버풀이 우승 경쟁을 하는 모습이 가장 보기 싫었던 일”이라며 “그래도 두 팀 중 하나가 반드시 우승해야 한다면 차라리 맨시티가 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만큼 맨유에 있어서 리버풀은 지역 라이벌마저 뛰어 넘는 ‘앙숙’이다.
맨체스터와 리버풀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각각 공업과 무역으로 성행한 도시들이다. 산업의 연계성을 고려했을 때 두 도시의 공고한 협력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러나 1894년 맨체스터가 물류 비용 절감을 위해 맨체스터에서 곧바로 아일랜드 해로 연결되는 맨체스터 운하를 건설했고 이후 리버풀의 무역업이 크게 타격을 입으면서 이때부터 두 도시간 앙금이 쌓이기 시작했다.
사실 맨유는 축구 역사상 오랫 동안 리버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맨유는 1958년 ‘뮌헨 참사’로 무너질 팀을 일으킨 ‘맷 버즈비’ 감독의 지도하에 1967-1968시즌 잉글랜드 클럽 최초로 유러피언컵을 제패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맨유는 맷 버즈비 감독의 은퇴 이후 2부리그에 강등되기도 하는 등 중하위권을 전전하는 그저 그런팀으로 전락했다. 반면 리버풀은 빌 샹클리-밥 페이즐리로 이어지는 최고의 명장들이 부임하면서 70~80년대 잉글랜드 무대는 물론 세계를 제패하는 ‘붉은 제국’을 구축한다.
스코틀랜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케니 달글리시, 리버풀에서 총 346골을 터뜨리며 클럽 최다 득점자인 이안 러시, 그리고 스티븐 제라드와 더불어 리버풀 사상 최고의 미드필더 그레이엄 수네스 등을 앞세운 리버풀은 20여년 동안 프리미어리그 11회 우승, FA컵 3회 우승, 리그컵 4회 우승, 유러피언컵 4회 우승이라는 압도적인 위업을 달성한다.
그러나 리버풀은 1985년 유벤투스와의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39명이 사망하고 454명이 부상당한 ‘헤이젤 참사’가 벌어진 후 6년 동안 유럽대항전 출전 금지를 받으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0년 이후 현재까지 무려 28년 동안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때 맨유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부임하면서 두 팀의 처지는 순식간에 180도로 변했다. 1988년 맨유로 부임한 퍼거슨 감독은 유소년팀에서 게리 네빌, 폴 스콜스, 데이비드 베컴, 라이언 긱스 등 이른바 ‘퍼기의 아이들’을 적극 기용하면서 팀의 기초를 다졌고 피터 슈마이켈, 에릭 칸토나 등을 영입하면서 1992-1993시즌 무려 26년만에 맨유에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을 가져왔다.
퍼거슨 감독은 2013년 은퇴 전까지 총 27년 동안 맨유를 이끌며 프리미어리그 13회 우승, FA컵 5회 우승, 리그컵 4회 우승, 챔피언스리그 2회 우승 등 총 38개의 트로피를 홈 구장 ‘올드 트래포드’로 가져왔다. 특히 퍼거슨의 맨유는 2010-2011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으로 리버풀을 제치고 프리미어리그 최다 우승팀으로 등극하면서 라이벌의 자존심을 흠집 냈다.
한편 리버풀의 스타 출신 마이클 오웬이 2009년 뉴캐슬 유나이티드서 맨유로 이적하기 전까지 양팀 사이에 선수 영입은 단 한건도 없었다. 2007년 파트리스 에브라에 주전 경쟁에서 밀린 가브리엘 에인세가 리버풀로 이적을 요청하자 이를 거절하고 레알 마드리드로 보낸 일은 유명한 일화다. 리버풀 팬들은 45년 동안 ‘금기’를 깨고 라이벌 팀으로 이적한 오웬을 지금까지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전설적인 수비수 출신으로 현재 축구 해설가로 활동 중인 게리 네빌은 최근 영국 매체 ‘스카이스포츠’에 기고한 칼럼에서 “라이벌인 맨체스터 시티와 리버풀이 우승 경쟁을 하는 모습이 가장 보기 싫었던 일”이라며 “그래도 두 팀 중 하나가 반드시 우승해야 한다면 차라리 맨시티가 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만큼 맨유에 있어서 리버풀은 지역 라이벌마저 뛰어 넘는 ‘앙숙’이다.
맨체스터와 리버풀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각각 공업과 무역으로 성행한 도시들이다. 산업의 연계성을 고려했을 때 두 도시의 공고한 협력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러나 1894년 맨체스터가 물류 비용 절감을 위해 맨체스터에서 곧바로 아일랜드 해로 연결되는 맨체스터 운하를 건설했고 이후 리버풀의 무역업이 크게 타격을 입으면서 이때부터 두 도시간 앙금이 쌓이기 시작했다.
사실 맨유는 축구 역사상 오랫 동안 리버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맨유는 1958년 ‘뮌헨 참사’로 무너질 팀을 일으킨 ‘맷 버즈비’ 감독의 지도하에 1967-1968시즌 잉글랜드 클럽 최초로 유러피언컵을 제패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맨유는 맷 버즈비 감독의 은퇴 이후 2부리그에 강등되기도 하는 등 중하위권을 전전하는 그저 그런팀으로 전락했다. 반면 리버풀은 빌 샹클리-밥 페이즐리로 이어지는 최고의 명장들이 부임하면서 70~80년대 잉글랜드 무대는 물론 세계를 제패하는 ‘붉은 제국’을 구축한다.
스코틀랜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케니 달글리시, 리버풀에서 총 346골을 터뜨리며 클럽 최다 득점자인 이안 러시, 그리고 스티븐 제라드와 더불어 리버풀 사상 최고의 미드필더 그레이엄 수네스 등을 앞세운 리버풀은 20여년 동안 프리미어리그 11회 우승, FA컵 3회 우승, 리그컵 4회 우승, 유러피언컵 4회 우승이라는 압도적인 위업을 달성한다.
그러나 리버풀은 1985년 유벤투스와의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39명이 사망하고 454명이 부상당한 ‘헤이젤 참사’가 벌어진 후 6년 동안 유럽대항전 출전 금지를 받으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0년 이후 현재까지 무려 28년 동안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때 맨유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부임하면서 두 팀의 처지는 순식간에 180도로 변했다. 1988년 맨유로 부임한 퍼거슨 감독은 유소년팀에서 게리 네빌, 폴 스콜스, 데이비드 베컴, 라이언 긱스 등 이른바 ‘퍼기의 아이들’을 적극 기용하면서 팀의 기초를 다졌고 피터 슈마이켈, 에릭 칸토나 등을 영입하면서 1992-1993시즌 무려 26년만에 맨유에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을 가져왔다.
퍼거슨 감독은 2013년 은퇴 전까지 총 27년 동안 맨유를 이끌며 프리미어리그 13회 우승, FA컵 5회 우승, 리그컵 4회 우승, 챔피언스리그 2회 우승 등 총 38개의 트로피를 홈 구장 ‘올드 트래포드’로 가져왔다. 특히 퍼거슨의 맨유는 2010-2011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으로 리버풀을 제치고 프리미어리그 최다 우승팀으로 등극하면서 라이벌의 자존심을 흠집 냈다.
한편 리버풀의 스타 출신 마이클 오웬이 2009년 뉴캐슬 유나이티드서 맨유로 이적하기 전까지 양팀 사이에 선수 영입은 단 한건도 없었다. 2007년 파트리스 에브라에 주전 경쟁에서 밀린 가브리엘 에인세가 리버풀로 이적을 요청하자 이를 거절하고 레알 마드리드로 보낸 일은 유명한 일화다. 리버풀 팬들은 45년 동안 ‘금기’를 깨고 라이벌 팀으로 이적한 오웬을 지금까지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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