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치코트를 입은 알랭 들롱. /사진=영화 '한밤의 암살자' 스틸컷
트렌치코트를 입은 알랭 들롱. /사진=영화 '한밤의 암살자' 스틸컷

트렌치코트의 계절인 봄이 코앞이다. 보온성이 뛰어나고 실용적이어서 일교차가 심한 간절기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트렌치코트는 대표적인 클래식 패션아이템이랄 수 있다. 특히 올겨울은 혹한이 몰아치던 지난해 겨울과 달리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며 이른 시기부터 트렌치코트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다.

영화 ‘카사블랑카’의 잉그리드 버그만처럼 우아하게 고독하려면, 험프리 보가트처럼 우수에 젖고자 한다면 꼭 필요한 아이템이지만 트렌치코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하나 있다. 바로 군복에 기원을 둔다는 점. 

◆영국 방수코트에서 유래한 트렌치코트

군복에서 유래한 옷이지만 트렌치코트가 전쟁의 유산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2차대전 후에는 여성들도 입으며 일상복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도랑, 참호를 뜻하는 트렌치(trench)와 외투를 의미하는 코트(coat)가 합쳐진 ‘트렌치코트’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이 착용한 전투용 방수코트에서 유래했다. 트렌치라는 말이 앞에 붙은 것은 영국군이 서부전선에서 장기간 참호전투를 벌여서다.

트렌치코트는 버버리사에서 소재를 개발해 일명 버버리코트로 불리는데 군복으로 채택됐던 버버리사의 코트가 전쟁이 끝난 뒤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버버리코트’라는 별칭을 얻은 것이다. 

1차대전 때 영국군이 입은 버버리 코트./사진=버버리 홈페이지
1차대전 때 영국군이 입은 버버리 코트./사진=버버리 홈페이지

버버리사의 창립자 토머스 버버리는 영국의 양치기들이 비올 때 걸치던 옷의 원단을 개조해 기능성 신소재 개버딘(gabardine)을 개발, 1888년 특허를 획득했다. 개버딘은 방수처리한 면사를 직조한 다음 재차 방수처리해 방수기능이 탁월했고 방한성·통기성·내구성도 뛰어났다. 

개버딘은 오늘날 트렌치코트의 전신인 ‘타이로켄’(tieloken)에 사용되는데 이 코트가 보어전쟁(1899~1902)에서 영국군의 군복으로 채택됐다.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전쟁을 치르던 영국군은 잦은 폭우와 무거운 방수코트로 인해 전술운용이 어렵게 되자 병사들이 원활히 활동할 수 있는 가벼운 방수복을 필요로 했다.


1914년 1차대전이 일어나자 기존 타이로켄에 견장과 D링이 추가된 오늘날의 트렌치코트 형태가 등장했다. 전통적 형태의 트렌치코트는 어깨의 견장,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덧댄 가슴과 어깨의 천, 고리에 끼운 비금속성 소재의 허리띠가 특징이다. 

◆실용성 최우선 디자인… 패션아이템으로


트렌치코트는 옷섶을 겹치고 단추를 두 줄로 단 더블브레스트에 스톰플랩(storm flap·어깨에서 앞가슴까지 늘어뜨려 단추를 여미는 가슴바대), 벨트, 견장 등을 부착하고 등 부분에는 케이프를 덧댔다. 이 같은 디자인은 철저히 실용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어깨에 달린 견장은 계급을 표시하거나 모자 등을 끼워넣을 수 있었으며 외관상 어깨를 넓어 보이게 해 위력적으로 만드는 효과도 있었다. 커다란 안주머니는 손상되기 쉬운 지도 등의 소지품을 보관하기에 적합했고 군인의 두 손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트렌치코트를 입은 험프리 보가트. /사진=영화 '카사블랑카' 스틸컷
트렌치코트를 입은 험프리 보가트. /사진=영화 '카사블랑카' 스틸컷

스톰플랩은 비바람을 막아주고 사격 시 반동을 줄여줬다. 코트는 팔을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래글런 소매’ 방식으로 제작됐으며 수류탄과 수통을 걸도록 D자 고리를 달았다.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손목에는 스트랩을 달았고 목 앞부분에는 안쪽에 천을 덧대었다.

이처럼 뛰어난 실용성 덕에 전장에서 활용되던 트렌치코트는 당대를 풍미한 영화배우들이 입으며 서서히 패션아이템으로 자리 잡는다. 로버트 테일러, 험프리 보가트가 연출한 트렌치코트는 넓고 강인한 어깨를 강조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쓸쓸한 이미지를 풍겼고 잉그리드 버그만, 케서린 햅번의 트렌치코트는 우아함과 고혹적인 매력을 돋보이게 했다. 


이후 시대가 변하며 트렌치코트도 다양하게 재해석됐다. 여성들은 벨트로 실루엣을 드러내며 세련되면서도 섹시한 이미지를 강조한 반면 첩보영화·범죄영화 전성시대에는 스파이와 마피아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며 냉혈한의 분위기를 풍겼다.

시대의 트렌드에 따라 색상, 소재, 스타일이 계속 변하고 있지만 트렌치코트는 여전히 분위기를 내는 데 필수적인 아이템임이 분명하다. 군용코트로 출발했지만 한세기를 지나는 동안 대중적이면서도 가장 트렌디한 패션아이템으로 부상한 것이다. 

오드리 햅번이 입었던 버버리사의 트렌치코트./사진=로이터
오드리 햅번이 입었던 버버리사의 트렌치코트./사진=로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