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 부산문화재단에서 재현한 조선통신사 행렬./사진=머니투데이 허경민 기자
부산시 부산문화재단에서 재현한 조선통신사 행렬./사진=머니투데이 허경민 기자

"우호관계를 영원히 유지하는 데는 간략하고 쉬운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귀국 사신이 올 경우 본주(대마도주)가 맞이해 접대하고 빙례를 시행하려 합니다. 이는 번거로움을 줄이고 비용을 절약하며 피차간에 항구적 제도로 삼기로 상호 약속해 우호를 견고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정조실록> 40권)

 
정조 18년(1794년) 9월20일, 조선 조정은 일본 대마도주가 보낸 서한으로 일본 성토에 핏대를 올렸다. 조선통신사를 에도(江戶)가 아닌 대마도에서 접대한 뒤 돌려보내겠다는 이 역지빙례는 당시 조선이 받아들일 수 없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조선은 당연히 이를 거부했다. 정조 때 해결하지 못한 이 역지빙례는 순조 11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마도에서 행해졌다. 그 뒤 이 역지빙례마저 없어져 조일외교관계는 1876년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맺어질 때까지 끊어졌다.

◆일본 변화, 눈치 못 챈 조선


일본의 역지빙례는 재정절감이라는 이유를 댔지만 조선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도쿠가와막부의 의중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전까지 일본은 연간 쌀 생산량의 12%에 이르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조선통신사 에도 방문을 극진히 환대했다.


17~18세기에 일본이 국교를 맺은 나라가 조선과 오키나와뿐이어서 조선이 외교상으로 매우 중요했고 조선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경제교역에서도 막대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은 점차 동남아, 중앙아시아, 중동, 서유럽과 해상무역을 늘리면서 조선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졌다. 조선과 교역하지 않아도 크게 아쉬울 것 없는 상황이 된 일본은 외교상 무례를 무릅쓰고서라도 역지빙례라는 실리를 챙기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만큼 일본이 조선보다 앞서기 시작했다는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정조를 정점으로 하는 조선 정부는 일본의 이런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정조는 일본이 조선보다 낫다는 생각을 꿈에서도 하지 않은 듯 했다. 역지빙례 서한을 받기 전에 에도를 갔다 온 통신사 일행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일본에 들어갈 때 영접객들에게 써준 한시가 귀국쯤 벌써 인쇄된 것을 봤지만 일본의 발전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저 인쇄가 빠르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나타냈을 뿐이다.


◆교만이 실패를 가져온다


문명은 교만할 때 무너진다. 이는 역사에서 수없이 되풀이됐다. 고대 유럽을 제패했던 서유럽은 게르만 출신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망했다. 로마 시민들이 군대가는 것을 꺼려 국방을 용병에 맡겼는데 그 용병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빼앗아 간 것이다.


중국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건륭제는 1793년 8월, 열하(현 승덕)에서 영국의 조지 매카트니 특사가 전한 조지 3세의 무역확대와 공사 상주 요청을 거부했다. 중국은 모든 것을 갖고 있어 영국과 교역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매카트니는 중국이 이미 쇠퇴의 길에 들어섰음을 간파했다. 그의 보고서에 따라 영국은 함포를 동원한 아편전쟁을 일으켰고 이는 결국 청이 몰락하는 원인이 됐다.

 
1980년대 중후반, 세계 2대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던 일본은 머지않아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가 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1990년대부터 ‘잃어버린 30년’이란 수렁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개혁개방 이후 40년 동안 연평균 10%라는 경이적인 실적으로 독일과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꿈을 내세우다 미국의 반격을 받고 주춤거리고 있다.


<순자> '해폐'편에 '비찰시 시찰비'(非察是 是察非)라는 말이 나온다. “(남들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에서 옳은 것을 살피고 옳다고 하는 것에서 그릇된 것을 살핀다”는 뜻이다. “그른 일에 용감하면서 옳다고 여기는 것은 적폐라 하고 매우 그른 것을 살피면서 옳다고 착각하는 것은 찬탈”이라는 지적이다.


이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지혜"(<논어> '위정'편)”라고 한 공자의 말을 부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없는 것에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지혜인 반면 인지로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아는 체 하는 것은 지혜의 적이라는 것이다.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는 공자의 이런 태도를 “모르는 것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착각하지 않으려는 삶에 대한 경건한 태도”(<위대한 사상가들,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 예수>)로 해석했다.


◆미조이모·상두주무의 지혜 필요할 때


전국 시대 때 위나라 재상 백규는 제방을 순시할 때 아주 작은 구멍이라도 발견하면 곧 막았다. 개미구멍이 제방을 허물어뜨리는 것을 막아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 미리 기미를 알고 대응하는 것이 지도자가 해야 할 일임을 보여줬다.

 
한비자는 이를 ‘미조이모'(未兆易謀)라고 했다. “문제가 드러나기 전에 대응하는 것이 쉬우니 어떤 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대책을 마련하라”는 뜻이다. 나타나지 않을 때 도모하라는 불현시도(不見是圖)나 비바람이 몰아치기 전에 뽕나무 뿌리를 물어다 둥지를 단단하게 수리하는 상두주무(桑土綢繆), 서리가 내리면 얼음이 단단하게 언다는 리상견빙지(履霜堅氷至)도 같은 내용이다.


공자, 순자, 한비자, 백규, 야스퍼스의 말과 행동은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다른 사람, 다른 나라의 앞선 지혜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지도자의 자세를 강조한 것이다. 그렇게 해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새 지혜를 만들어 내는 패치워크(짜깁기, 접붙이기)를 통해 정조가 일본의 역지빙례의 뜻을 파악하지 못해 조선을 쇠락의 길로 떨어지도록 했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게 된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81호(2019년 2월26일~3월4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