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비 인상 필요 없다”… 문제는 ‘백마진’
[이슈포커스-‘택배기사’ 빠진 택배 대책①] 근무 시간 줄인다고?… 택배기사 벌이 ‘악화일로’
김경은 기자
26,784
공유하기
![]() |
정부가 택배비 인상을 추진한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택배비 인상으로 인한 택배 노동자 처우 개선 가능성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사진=뉴스1 DB |
국내 택배사업이 태동한 1990년대 초반 택배요금은 수도권 4500원, 지방은 7000원에 육박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TV홈쇼핑과 온라인 쇼핑몰의 등장으로 물량이 증가하자 업계가 경쟁적으로 단가를 낮추면서 택배비는 3000원대로 떨어졌다. 2010년대 초반엔 이커머스 시장이 커지면서 요금은 2000원대로 더 낮아졌다.
물량은 폭증했다. 한국통합물류협회에 따르면 연간 국내 택배물량은 1998년 5975만개에서 지난해 27억9000만개까지 47배 증가했다. 택배 단가가 반토막나는 상황에서도 택배회사가 사업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정작 택배기사의 형편은 나아지지 못했다. 올해만 13명의 택배 노동자가 과로사 추정 사망하게 된 배경이다.
떨어지기만 하던 택배요금이 내년엔 인상될 가능성이 높다. 택배 노동자의 과로사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택배비 현실화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택배요금이 지나치게 낮아 택배기사의 노동에 제값을 지불하지 못하고 있다는 여론이 형성됐고 정부도 개입에 나섰다. 하지만 택배비 인상이 노동자 처우 문제의 해답이 될지는 여전히 물음표다.
누구를 위한 택배 대책인가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12일 정부 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택배기사 과로방지 대책’을 발표했다. 정부는 현재 주 6일제인 택배기사 근무제도를 주 5일제로 바꾸고 밤 10시 이후 심야배송은 제한할 것을 권고했다. 밤 10시 이후 미배송 물량은 지연배송으로 관리하면서 적정 작업시간을 유지할 방침이다.
하지만 정작 현장에선 볼멘소리가 나온다. 근무시간이 단축될 경우 소득 보전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대리점과 위탁계약을 맺는 택배기사는 배송 건당 수수료를 받는 개인사업자다. 작업시간을 제한할 경우 배송 건수가 줄어 소득이 감소할 우려가 있다는 게 현장 반응이다.
16년차 택배기사 강모씨는 이번 대책에 대해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택배 일을 하려는 젊은이가 많은 이유는 ‘일한 만큼 벌어간다’는 단순한 믿음 때문”이라며 “근무 조건만 좋아질 뿐 수익은 줄어드는 대책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 |
“택배비 올라도 살림살이 그대로”
정부는 택배요금을 올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요금이 오르면 이전보다 적게 일해도 소득을 유지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현장에선 택배비 인상이 택배기사 처우 개선으로 이어지기 어렵다고 본다. 지금과 같은 수익구조에선 택배비를 인상하더라도 택배기사의 몫이 크게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택배요금은 ‘판매자-택배사-대리점-택배기사’ 등 4자가 나눠 갖는 구조다. 택배기사가 받는 수수료는 배송 급지(구역)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택배요금의 30% 수준이다. 3급지에 해당하는 서울 은평구에 배송하는 경우 고객이 택배요금으로 지급한 2500원 중 택배기사에게 돌아가는 몫은 780원에 그친다.
택배기사는 자기 몫의 수수료 780원 중 부가세 10%를 내고 남은 702원을 다시 대리점과 나눈다. 대리점 수수료는 평균 10~15%, 최대 30%. 최종적으로 택배기사 손엔 500원 정도만 남는다.
택배기사의 몫이 적은 이유는 ‘백마진’으로 불리는 리베이트 때문이다. 월 배송 1만건이 넘는 대형 화주의 주문 물량을 따내기 위해 택배업체 간 경쟁을 벌인 결과 택배비 일부를 판매자에게 돌려주는 백마진 관행이 등장했다. 정부 추산 백마진은 건당 평균 600원이나 된다.
이런 불공정 관행을 바로잡지 않는 이상 택배비 인상은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게 현장의 지적이다. 김세규 전국택배연합노동조합 교육국장은 “판매자에게 돌아가는 백마진으로 인해 배송 수수료는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며 “백마진을 없애면 소비자가 내는 택배요금을 인상하지 않더라도 택배기사 수수료를 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 |
/그래픽=김영찬 기자 |
백마진, 못 없앴나 안 없앴나
택배업계에선 백마진이란 개념 자체를 부정한다. 대형 화주와의 계약을 위해 타 택배사보다 낮은 가격을 제시할 뿐 뒤에서 따로 비용을 지급하는 일은 없다고 주장한다. 즉 ‘최저입찰제’로 인해 택배 단가가 자연스럽게 하락하는 구조라는 설명이다.
CJ대한통운 관계자는 “백마진은 없다”며 “많은 물량을 거래할수록 배송 단가를 할인해주는 차원”이라고 말했다. CJ대한통운의 한 대리점주는 “잘못된 관행은 맞지만 리베이트로 봐선 안 된다”며 “택배사와 낮은 가격에 거래하는 판매자는 그만큼 소비자 가격을 낮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형 화주가 인하된 가격에 배송 계약을 한 뒤 소비자에게 정가의 택배비를 받는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소비자로부터 2500원의 택배비를 받아놓고 택배사에 2000원을 지급할 경우 나머지 500원의 사용처는 알 길이 없다. 백마진이 거래 장부에 적히지 않는 점을 이용해 탈세와 비자금 조성 수단으로 악용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택배사는 이런 문제를 방관하고 있다. CJ대한통운 관계자는 “소비자에게 받는 택배요금과 실제 배송비의 차액은 판매자가 포장 등 물류비용의 일환으로 쓰지 않겠느냐”며 “차액의 용처까지 택배사가 알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정부도 그동안 백마진 문제에 대해 기업(택배사)과 기업(판매자) 간 거래에서 진행되는 사안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개입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여 왔다. 하지만 택배 수수료 현실화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자 뒤늦게 문제를 논의하려는 움직임을 드러냈다.
정부는 판매자·택배사·대리점·택배기사 간 계약 관행과 거래조건 등 시장 실태 파악을 위한 점검을 실시하고 불공정행위 확인 시 엄정 조치한다는 방침이다. ‘부정한 대가의 지급 및 수취’를 금지하는 내용이 담긴 ‘생활물류서비스발전법’도 연내 제정하고 공포 6개월 뒤 본격 시행할 계획이다.
<저작권자 ⓒ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의 경제 뉴스’ 머니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보도자료 및 기사 제보 ( [email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