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박동해 기자 =

압둘와합 헬프시리아 사무국장이 18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갖고 있다. 2021.2.18/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압둘와합 헬프시리아 사무국장이 18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갖고 있다. 2021.2.18/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10년 전인 지난 2011년 3월 고국 시리아에서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시작됐을 당시 한국에 유학생 신분으로 머물고 있던 압둘와합(알무함마드아가압둘와합·37) 헬프시리아 사무국장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폭압적인 알 아사드(al-Assad)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이 터져 나온 만큼 곧 그가 늘 꿈꾸던 '아름답고 민주적인 시리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리아의 혼란은 10년 지난 2021년에도 '현재진행형'이다. 정부의 폭력적인 진압에 민중들의 시위는 무장 반군으로 변화해 내전이 촉발됐고 주변 강대국들과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인 IS(이슬람국가)의 개입까지 이어지면서 시리아는 무정부 상태가 됐다. 수십만이 전쟁에 화마 속에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의 난민들이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시리아엔 이제 제대로 된 가족이 전혀 없다. 최소 한 사람은 전쟁에서 죽거나 납치되거나 난민이 됐다." 지난 18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난 압둘와합은 10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인해 '상실'을 경험하지 않은 시리아인이 없다고 했다. 그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라며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사회 구조가 모두 무너졌고 사람들도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내전 10년째인 고국의 소식을 전했다.

시리아에서 법학을 전공한 압둘와합은 졸업 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수습 생활을 하다가 유학을 온 한국인 친구들을 만나면서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던 중 더 늦어지면 새로운 것을 배울 기회가 없다고 생각해 2009년 한국행을 택했다. 석·박사 과정만 마치고 시리아로 돌아가 변호사 생활을 재개하거나 한국 관련 학문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내전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전쟁의 장기화로 난민들이 속출하자 그는 한국에서 만난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2013년 시리아 난민들을 돕는 시민단체 '헬프시리아'를 만들었다. 자연스레 본인의 전공인 상법에 더해 난민법을 들추며 공부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또 SNS를 통해 민주주의 시위를 탄압하는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메시지를 계속해 생산하고 공유하다 보니 어느새 반체제 성향의 난민 지원단체 활동가가 됐다.

한국에 있는 압둘와합을 직접 탄압할 수 없었던 시리아 정부는 서류를 발급하지 않는 방법을 썼다. 특히 여권 갱신이 되지 않았다. 여권이 만료되면서 체류를 위한 비자도 6개월 단위로만 연장할 수 있었다. 계속해 자신을 옳아메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귀화를 선택해 지난해 10월 한국 국적을 획득했다.


지난 2015년 9월2일 터키 보드럼 해안가에서 세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이 '아일란 쿠르디'(본명 알란 셰누)의 주검이 발견되는 장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시리아 내전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집중됐다. © AFP=뉴스1
지난 2015년 9월2일 터키 보드럼 해안가에서 세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이 '아일란 쿠르디'(본명 알란 셰누)의 주검이 발견되는 장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시리아 내전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집중됐다. © AFP=뉴스1

압둘와합 뿐만 아니라 내전은 약 2300만명의 시리아 사람들의 삶이 극단적으로 바꿔놓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 세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점차 잊히고 있다. 지난 2015년 내전을 피해 가족들과 함께 유럽으로 이동하던 도중 배가 난파돼 사망한 세살배기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이 국제적으로 파장을 일으키면서 국내에서도 시리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지루한 전쟁이 계속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비극에 익숙해졌다.

관심이 사그러지자 헬프시리아로 이어지던 후원도 줄어들었다. 쿠르디 사건 이후 수천만원대까지 늘었던 후원의 손길은 2017년 이후부터는 상당수 끊어진 상태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후원 해지를 묻는 문의가 계속됐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시리아로 보내는 지원이 줄어들고 있음을 체감할 수도 있었다. 압둘와합은 "터키에서 시리아로 구호물자를 보내는 데 2015년에는 대기하고 있는 물자가 많아 국경을 통과하는 데만 두달 가까이 걸렸지만 2018년에는 물자를 실은 트럭이 헬프시리아 것 한대 밖에 없어 5분만에 통과했다"며 "그런 것을 볼 때 가슴이 아팠다"고 전했다.


국제 사회의 지원이 줄면서 시리아 내부 난민들의 생활은 더욱 악화됐고 주변 국가들에서 국경 봉쇄를 강화하면서 국외로의 탈출도 어려워졌다. 압둘와합은 "시리아 내 지역 난민캠프 활동가들과 현장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갈수록 그 사람의 말이 잔인해진다"라며 "예전에는 '힘들다. 힘들다' 정도만 말을 했는데 이제는 '내일까지 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고 덧붙였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압둘와합과 헬프시리아는 시리아 난민들의 미래를 바꾸기 위한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헬프시리아는 '미래를 위해서는 아이들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난민들의 요청을 바탕으로 시리아 난민 캠프 내 학교를 짓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헬프시리아 회원들의 적극적인 모금 활동으로 학교 건축을 위한 돈이 모였고 2019년 4월1일 건축 예약이 완료됐다. 학교 운영을 위한 터키 교육부의 지원도 약속받았다.

지난 2019년 8월 시리아 알레포에 건립된 '이끄라 초등학교'앞에서 공사에 참여한 단체 관계자들과 학교 학생들이 모여있다.(헬프시리아 제공) © 뉴스1
지난 2019년 8월 시리아 알레포에 건립된 '이끄라 초등학교'앞에서 공사에 참여한 단체 관계자들과 학교 학생들이 모여있다.(헬프시리아 제공) © 뉴스1

애초에 공사는 9개월이 걸릴 예정이었으나 3개월 만에 건축이 완료됐다.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학교를 지어주기 위해 공사에 참여한 난민들은 24시간 내내 작업을 하며 공기를 1/3로 앞당겼다. 그렇게 2019년 9월부터 950명의 학생들이 새로 생긴 초등학교에 다니게 됐다. 학교 앞에는 한글과 아랍어로 "이 학교는 시리아 평화를 염원하는 한국 시민들의 마음으로 세워졌다"는 내용을 세긴 기념비가 섰다.

코로나로 인해서 지난해 8월부터 학교 운영을 중단해야 했지만 헬프시리아는 감염병 확산이 잠잠해지는 대로 교육을 재개할 방침이다. 압둘와합은 "각 난민 캠프마다 몇백명씩 다합치면 20만명의 어린이들이 학교가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하고 있다"라며 아이들을 위해 시리아 내에 학교를 더 지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인터뷰 마지막 압둘와합은 '어떤 향후 계획이 있는지 결국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묻는 질문에 단순히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답했다. 그는 지난 10년간 자신의 삶의 목표와 계획이 완전히 수정되는 삶을 경험하면서 "계획을 해도 결국 반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며 구체적으로 뭔가 이루겠다는 계획보다 그냥 평범하고 행복한 시민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종국에는 시리아에 평화가 찾아와 시리아 난민들을 돕는 자신의 일이 '필요없는 일'이 됐으면 한다며 그 이후에는 시리아와 한국의 교류를 돕는 활동을 하고 싶다고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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