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8월23일 오전 6시쯤 경기 부천군(현 인천광역시 중구)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던 공군 소속 684부대 북파공작원 24명이 교관과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부대를 이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진=실미도 전우회 제공
1971년 8월23일 오전 6시쯤 경기 부천군(현 인천광역시 중구)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던 공군 소속 684부대 북파공작원 24명이 교관과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부대를 이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진=실미도 전우회 제공


1971년 8월23일. 인천광역시 중구 실미도에 위치한 대한민국 공군 684부대 북파공작원 24명이 부대원을 살해하고 시외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로 돌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북파공작원들은 군인,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서울 동작구 대방동 거리에서 진압 병력에 포위돼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북파공작원들은 버스 안에서 수류탄을 터뜨렸다.


실미도에서 숨진 1명을 제외하고 버스 안에는 23명의 북파공작원이 타고 있었다. 수류탄 자폭으로 이들 중 19명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4명은 큰 부상을 입은 채 체포됐다. 살아남은 4명의 북파공작원은 1972년 1월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같은 해 3월 모두 총살당했다. 이들의 장례 절차는 진행되지 않았으며 시신조차 암매장됐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684부대의 탄생

1968년 1월21일 발생한 김신조 사건이 684부대 창설의 기폭제가 됐다. 사진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본사 앞에 마련된 실미도사건 현장 동판. /사진= 이강준 기자
1968년 1월21일 발생한 김신조 사건이 684부대 창설의 기폭제가 됐다. 사진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본사 앞에 마련된 실미도사건 현장 동판. /사진= 이강준 기자


24명의 북파공작원은 어떻게 해서 탄생했을까.

3년 전인 1968년 1월21일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로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총 31명 중 유일하게 투항한 김신조만 살아남고 도주한 2명을 제외한 나머지 28명은 모두 사살됐다. 이튿날 생중계로 진행한 '무장 간첩 사살 및 북한의 만행'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김신조에게 침투 목적을 묻자 김신조는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밝혀 온 국민을 놀라게 했다.


김신조 사건을 계기로 1968년 4월 북파 부대인 일명 '684부대'가 창설됐다. 684부대를 만든 목적은 '김일성 암살'이다. 북한 무장공비 수와 같은 31명의 부대원은 실전과 동일한 훈련과 철저한 인민군식 훈련을 받으며 단 3개월 만에 북파가 가능한 인간병기로 개조됐다.

'684 특수부대'가 집단 탈출한 이유

1971년 8월23일 오전 6시쯤 교관과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한 이후 섬을 빠져나간 23명의 684부대원들은 낮 12시20분쯤 인천 옥련동 독부리(옹암) 해안에 상륙한 뒤 인천 시내버스를 탈취해 청와대 방향으로 향했다. 사진은 영화 '실미도' 스틸컷. /사진=시네마서비스 제공
1971년 8월23일 오전 6시쯤 교관과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한 이후 섬을 빠져나간 23명의 684부대원들은 낮 12시20분쯤 인천 옥련동 독부리(옹암) 해안에 상륙한 뒤 인천 시내버스를 탈취해 청와대 방향으로 향했다. 사진은 영화 '실미도' 스틸컷. /사진=시네마서비스 제공


이후 3년4개월 동안 출동 명령만을 기다리던 이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1970년대 초 7·4 남북공동성명 등 남북관계가 급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중앙정보부장이 바뀌는 바람에 북파 계획은 번복되고 말았다. 부대 예산감소로 봉급이 줄고 음식과 보급품 등이 부실해졌다. 나아가 교관과 조교들이 바뀌면서 부대원들은 점점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보안 유지를 위해 부대원들을 몰살시킬 수 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이 소식을 접한 부대원들은 1971년 8월23일 교관과 조교들을 살해한 뒤 실미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청와대를 향해 돌진했다.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버스를 탈취하고 서울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정부는 이들을 '비밀 부대원'이 아닌 '무장공비'로 간주해 대응했다. 정부는 서울 동작구 대방동 현 유한양행 건물 앞에서 육군과 경찰을 동원해 이들을 저지했다. 부대원들은 포위망이 좁혀오자 버스 안에서 수류탄을 터트려 자폭했다. 이 중 4명은 큰 부상을 당했지만 살아남았다.

애초 이들을 무장공비라고 발표했던 박정희정권은 하루 뒤 군대 내 범죄자를 뜻하는 '군 특수범'이라고 말을 바꿨다가 육군 준장 출신 야당 의원이 '공군 산하 무장 특공대'라고 폭로하자 결국엔 이를 인정했다.

"살려주겠다" 약속에 생존 부대원 침묵… 결국 사형

부대원들은 수류탄을 터트려 자폭했고, 생존자 4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돼 1972년 3월10일 사형에 처해졌다. 사진은 지난 2017년 8월 경기 고양시 벽제동 육군 제11보급대대 제7지구 신축봉안소에서 열린 '고(故) 실미도 공작원 합동봉안식'에서 유가족들이 사진을 만져보는 모습. /사진=뉴시스
부대원들은 수류탄을 터트려 자폭했고, 생존자 4명은 군사재판에 회부돼 1972년 3월10일 사형에 처해졌다. 사진은 지난 2017년 8월 경기 고양시 벽제동 육군 제11보급대대 제7지구 신축봉안소에서 열린 '고(故) 실미도 공작원 합동봉안식'에서 유가족들이 사진을 만져보는 모습. /사진=뉴시스


생존한 부대원 4명은 끝내 정부로부터 버림받았다. 군은 국회 진상조사를 앞두고 이들에게 "보안상 절대 말할 수 없다고 답하면 (너희들은) 살 수 있다"며 회유했다. 이들은 국회 진상조사에서 야당 의원들이 역할과 업무에 대해 묻자 "비밀사항이라 말씀드릴 수 없다"며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이들 4명은 1972년 1월 모두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같은해 3월 사형집행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들은 사형 집행 전 유언을 남겼다. 김병염 대원은 "살아 생전 국가에 대해 말도 못하고 죽는 게 아깝다. 제가 죽더라도 집에 알리지 말아달라"라고 말했다. 임성빈 대원은 "바다 한복판 섬에서 부모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만 3년 동안 외롭게 지내다 김일성의 목을 베지 못하고 죽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전했다. 김창구 대원은 "3남매 아이들이 제일 불쌍하다. 보고 싶다"고 유언을 남겼고 이서천 대원은 애국가를 부른 뒤 "국가를 위해 싸우지 못하고 국민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는 게 억울하다"고 밝혔다.

이들은 초병 살해죄로 기소됐는데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됐고 국방부는 사형 집행 사실을 유족에게 알리지 않았다. 또 사체를 유족에게 인도하지 않고 임의로 매장했다.

53년 만에 '실미도 사건' 사과 결정한 정부

국방부 장관이 실미도 사건 발생 53년 만에 공식사과하기로 했다. 사진은 지난 2017년 8월 경기 고양시 벽제 군봉안소에서 열린 故 실미도 부대원 합동 봉안식. /사진=뉴스1
국방부 장관이 실미도 사건 발생 53년 만에 공식사과하기로 했다. 사진은 지난 2017년 8월 경기 고양시 벽제 군봉안소에서 열린 故 실미도 부대원 합동 봉안식. /사진=뉴스1


사건 발생 53년 만에 국방부는 과거사정리위원회 권고를 받아들여 공식사과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2006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와 2022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실미도 사건과 불법 암매장 등과 관련해 국가 차원의 사과를 권고했다. 국방부는 검토를 거쳐 지난해 장관이 사과의 뜻을 전하기로 결정했고 유족회와 조율을 거쳐 개토제 행사에서 이를 전달하기로 했다.

이에 국방부는 오는 9~10월 진행되는 실미도 사건 희생자 유해 발굴 개토제에서 신원식 장관의 사과문을 전할 예정이다. 개토제는 묘지 조성을 위해 땅을 처음 팔 때 지내는 제사로 실미도 사건 당시 사형에 처한 뒤 암매장된 실미도 부대원 4명이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경기 고양시 서울시립승화원 벽제리 묘지에서 진행한다.

국방부는 유해가 식별되면 유전자(DNA) 감식을 통해 신원을 확인하고 발굴된 유류품을 보존한다는 방침이다. 국방부는 실미도가 마주 보이는 인천 지역에 추모공원을 건립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