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지형의 여행의 향기] 길에서 만난 노블리스 오블리제
채지형 한국여행작가협회 여행작가
1,016
2024.10.16 | 08: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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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시 여행이 새로운 트렌드다. 일본 오카야마현 구라시키는 과거와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아담한 도시로, 여행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여행지다.
버드나무가 운치를 더하는 운하와 줄줄이 이어진 새하얀 벽도 아름답지만, 구라시키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은 오하라미술관이었다.
1930년 일본 최초 서양식 미술관으로 문을 연 오하라미술관에는 소도시에서 보기 드문 거장의 작품이 미술관을 가득 메우고 있다. 건물부터 남다르다.
그리스 신전 같은 이오니아 양식의 웅장한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입구에는 세례자 요한과 칼레의 시민이 관람객을 맞는다.
엘 그레코의 '수태고지'를 비롯해 마네, 모네, 고갱, 모딜리아니, 세잔, 드가, 밀레 등 미술사에 빛나는 거장들의 원작 3500여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본관 2층에는 레옹 프레드릭이 25년 동안 공들여 완성한 대작 '만유는 죽음으로 돌아가나, 신의 사랑은 만유를 다시 소생시키고'가 관람객을 기다린다.
하루를 다 써도 아깝지 않은 오하라미술관에서 작품만큼이나 감동적인 것은 오하라 가문의 이야기다. 오하라가문을 이끈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구라시키의 대지주로, 방적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는 축적한 부를 허투루 쓰지 않았다. 고아원과 학교를 세우는 등 사회사업을 펼치는 한편, 전폭적으로 예술 분야를 지원했다. 장학생이었던 고지마 토라지로와 우정을 맺으며 예술에 대한 안목을 키웠고, 고지마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를 애도하며 오하라미술관을 세웠다.
오하라미술관을 돌아보며, 인생에서 부가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 부를 어떻게 써야하는 지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얼마 전 찾은 경주 교동 최부자집에서는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300년 동안 12대를 이어 만석의 부를 일군 최부자집. 오랫동안 부를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와 부가 끊길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가슴에 오래 남았다.
교동 최부자집에서 먼저 눈길이 가는 공간은 곳간이다.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곳간은 당시 우리나라 가정집 곳간으로는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최부자집에는 유명한 6훈(六訓)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사방 백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다.
흉년이 들면, 굶주리는 이를 살리기 위해 죽을 쑤고 쌀을 나눠주곤 했다. 교동으로 이사 오기 전 살았던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있는 충의당에는 최부자집의 나눔 정신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어, 당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게 하라,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마라,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등 최부자집의 교훈은 부자의 품격을 보여준다.
평소에 어려운 이를 돕는데 아끼지 않은 덕에, 부자의 재물을 약탈해 빈민에게 나눠주던 활빈당도 최부자집만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300년을 이어온 부의 명맥은 12대 최준 선생 때 끊겼다.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며, 일제에 나라를 뺏기자 독립운동에 사재를 털었기 때문이다. 독립 후에는 교육을 일으키기 위해 재산을 바쳤다.
고택을 둘러보고 있을 때 어디에선가 "대한독립 만세"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알고 보니 최준 선생에 대한 공연 리허설이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뜨거움이 밀려올라왔다.
부자는 많지만, 존경할만한 부자는 찾기 힘든 요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최부자와 오하라 가문 이야기가 더 귀하고 고맙게 다가온다.
버드나무가 운치를 더하는 운하와 줄줄이 이어진 새하얀 벽도 아름답지만, 구라시키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은 오하라미술관이었다.
1930년 일본 최초 서양식 미술관으로 문을 연 오하라미술관에는 소도시에서 보기 드문 거장의 작품이 미술관을 가득 메우고 있다. 건물부터 남다르다.
그리스 신전 같은 이오니아 양식의 웅장한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입구에는 세례자 요한과 칼레의 시민이 관람객을 맞는다.
엘 그레코의 '수태고지'를 비롯해 마네, 모네, 고갱, 모딜리아니, 세잔, 드가, 밀레 등 미술사에 빛나는 거장들의 원작 3500여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본관 2층에는 레옹 프레드릭이 25년 동안 공들여 완성한 대작 '만유는 죽음으로 돌아가나, 신의 사랑은 만유를 다시 소생시키고'가 관람객을 기다린다.
하루를 다 써도 아깝지 않은 오하라미술관에서 작품만큼이나 감동적인 것은 오하라 가문의 이야기다. 오하라가문을 이끈 오하라 마고사부로는 구라시키의 대지주로, 방적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는 축적한 부를 허투루 쓰지 않았다. 고아원과 학교를 세우는 등 사회사업을 펼치는 한편, 전폭적으로 예술 분야를 지원했다. 장학생이었던 고지마 토라지로와 우정을 맺으며 예술에 대한 안목을 키웠고, 고지마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를 애도하며 오하라미술관을 세웠다.
오하라미술관을 돌아보며, 인생에서 부가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 부를 어떻게 써야하는 지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얼마 전 찾은 경주 교동 최부자집에서는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300년 동안 12대를 이어 만석의 부를 일군 최부자집. 오랫동안 부를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와 부가 끊길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가슴에 오래 남았다.
교동 최부자집에서 먼저 눈길이 가는 공간은 곳간이다.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곳간은 당시 우리나라 가정집 곳간으로는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최부자집에는 유명한 6훈(六訓)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사방 백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다.
흉년이 들면, 굶주리는 이를 살리기 위해 죽을 쑤고 쌀을 나눠주곤 했다. 교동으로 이사 오기 전 살았던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있는 충의당에는 최부자집의 나눔 정신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어, 당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게 하라,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마라,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등 최부자집의 교훈은 부자의 품격을 보여준다.
평소에 어려운 이를 돕는데 아끼지 않은 덕에, 부자의 재물을 약탈해 빈민에게 나눠주던 활빈당도 최부자집만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300년을 이어온 부의 명맥은 12대 최준 선생 때 끊겼다.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며, 일제에 나라를 뺏기자 독립운동에 사재를 털었기 때문이다. 독립 후에는 교육을 일으키기 위해 재산을 바쳤다.
고택을 둘러보고 있을 때 어디에선가 "대한독립 만세"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알고 보니 최준 선생에 대한 공연 리허설이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뜨거움이 밀려올라왔다.
부자는 많지만, 존경할만한 부자는 찾기 힘든 요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최부자와 오하라 가문 이야기가 더 귀하고 고맙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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