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박태준 회장과 박종태 포항제철 초대 소장 등 직원들이 용광로에서 첫 쇳물을 뽑는 데 성공하자 다같이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고 있다. /사진=포스코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박태준 회장과 박종태 포항제철 초대 소장 등 직원들이 용광로에서 첫 쇳물을 뽑는 데 성공하자 다같이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고 있다. /사진=포스코


"만세! 만세!"

1973년 6월9일 청암(靑岩)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 임직원들은 첫 쇳물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외쳤다. 포항제철소 착공 3년 만의 성과였다.


박 명예회장은 고로 화입 성공 후 직원들을 향해 "여러분은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을 이뤄냈고, 나에게는 생명의 은인이다"라고 말했다.

포스코의 시작은 1967년 정부가 포항을 종합제철 입지로 선정하고 '종합제철 건설사업 추진위원회'를 발족하며 시작됐다. 당시 박 명예회장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종합제철소 건설에 뛰어들었다. 당시 모두가 철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한국은 자본도 기술도 부족해 우려하는 시각이 많았다.


박 명예회장은 무조건 종합제철소를 성공적으로 이뤄내겠다는 의지로 사업을 추진했다. 1969년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이 차관 약속을 저버리기로 하면서 대일청구권자금이 제철소 건설에 활용됐기 때문이다. 일제의 식민지 배상금으로 짓는 제철소이기에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박 명예회장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가 실패하면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자"며 "제철보국을 우리 인생의 신조로 삼자"고 했다.
1970년 포항제철소 열연공장, 증후판공장이 첫 삽을 떴다. 이듬해인 1971년 제선공장, 제강공장 등 주요 공장이 착공했다. 영일만의 첫 공장으로 증후판공장이 준공해 첫 제품을 출하하는 성과를 냈다.


포항제철소 1고로는 첫 출선에 성공하며 연산 조강 103만톤 체제를 이룩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곧장 포항2기 건설 종합착공에 나섰다.

199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묘소 앞에서 제철보국 임무 완수 보고를 올리는 박태준 명예회장. /사진=포항시개발자문위원회 연합회
199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묘소 앞에서 제철보국 임무 완수 보고를 올리는 박태준 명예회장. /사진=포항시개발자문위원회 연합회


철강왕이라 칭송받는 미국의 카네기는 당대 35년 동안 연산 조강 1000만톤을 이뤘지만, 박 명예회장은 당대 25년(1968~1992년) 안에 연산 조강 2100만톤을 달성했다. 기술력과 자본력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카네기보다 짧은 기간에 그 2배가 넘는 규모로 키워낸 것이다. 생전에 제철소를 두 곳이나 세운 인물은 박 명예회장이 유일하다. 현재 포스코는 연산 3045만톤 규모의 조강생산을 기록하는 철강사로 성장했다.

박 명예회장은 공기업 체제에 따르는 비효율과 부실의 여지를 막기 위해 조직의 자율과 책임문화를 강조했다. 이러한 책임의식은 자연스럽게 완벽주의로 연결됐다.

1977년 3기 설비가 공기지연으로 고전하고 있을 때도 발전 송풍 설비 구조물 공사에서 부실이 발견되자 80% 정도 진행된 상태였지만 부실공사를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며 모두 폭파한 일은 완벽주의의 의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2011년 9월19일 박 명예회장은 함께 근무하던 현장근로자 400여명과 재회했다. 단상에 선 박 명예회장은 직원들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운을 뗐다.

그는 "우리가 영일만 모래벌판에서 청춘을 보내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지만 우리는 후세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희생하는 세대였다"며 "대한민국이 눈부신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동력은 여러분의 피땀이었다"고 말했다.

수십년 만에 직원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눈 지 석달이 지난 2011년 12월13일 박 명예회장은 8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청암(靑岩)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사진=포항시개발자문위원회 연합회
청암(靑岩)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사진=포항시개발자문위원회 연합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