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 박승직, 근대 경영 철학으로 최장수 기업 '두산' 일구다
'배오개 거상' 박승직 두산 창업주 74주기
최유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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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0 | 05: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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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斗) 한 말씩 쌓아서 태산같이 커지라'
1950년 12월20일 세상을 떠난 매헌 박승직은 이 같은 뜻을 담아 상회 이름을 '두산'(斗山)으로 지었다. 두산그룹의 전신인 두산상회는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기업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회사로 성장했다.
1896년 박승직은 33살의 나이에 서울 종로 4가 15번지에 두산그룹의 모태인 '박승직상점'을 열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육의전이 폐지되면서 상점을 개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전까지 상인들은 관의 허가를 받아야 장사를 할 수 있었지만 규제가 해소되면서 일반인도 자신만의 가게를 가질 수 있게 됐다.
초기에 가장 주력한 제품은 직물이었다. 영국과 일본 제품 수입이 확대되자 전국 각지의 포목상을 대상으로 물품을 도매했다.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 평강 등지에 지점을 설치하고 판매망을 넓혀 나갔다.
박승직은 동대문과 종로 일대에서 영향력을 인정받으면서 '배오개 거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00년대 들어서부터는 국내 상계 유력 인사로 정부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1900년 성진 감리서 주사에 임명됐으며, 1905년에는 육품에 승서됐다. 이듬해인 1906년에는 중추원 의관에 선임, 정상품에 승서돼 능력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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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직은 정식 상업단체에 몸담기 시작했다. 1906년부터 1911년까지 한성상업회의소에서 상의원으로 면포업계 상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사업신장에 헌신했다. 경성포목상조합, 직물상공제회, 중앙번영회 등을 설립해 상계를 이끌었다.
1907년엔 일본으로부터 얻은 1500만원의 차관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70여원을 모금해 당시 이 운동을 주도했던 광문사에 기부했다.
박승직이 전국적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것은 1915년 화장품 '박가분'을 판매하면서부터다. 박승직 부인인 정씨가 내조의 일환으로 면포 상품 고객에게 사은품으로 제공하던 분 수요가 늘자 정식 상품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박가분 제조본포는 1918년 특허국으로부터 상표등록증을 받으며 선도적인 위치에 올랐다.
1925년엔 주식회사로 개편하며 상업 근대화에 앞장섰다. 박승직상점은 그의 자산 1만5000원과 공익사로 차입한 4만5000원을 출자해 자본금 6만원의 주식회사로 개편했다. 1주당 가격은 50원으로 총 1200주의 주식을 발행했다. 주식회사 개편 이후 재고 상품에 보험을 가입하는 등 상품 관리에도 만전을 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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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변화는 회계처리 방식이다. 연말 결산서에는 순이익, 매출 총액, 매출 채권, 매입 채무, 차입금, 상품 재고, 예금액 등을 분석할 수 있도록 체계화했다. 결산은 매년 3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로 설정했다. 1935년부터는 품목별, 상표별 판매고를 명시해 상품의 판매동향을 알아볼 수 있도록 정리했다.
1946년 박승직은 무역업과 운수업을 위해 '두산상회'를 개업했다. 이때 재산과 사업권은 장남 박두병에게 넘겼다. 두산상회는 정부로부터 동양맥주를 불하받아 관련 사업을 영위하며 자본을 축적했다. 기술소재사업, 정보유통사업, 생활문화사업 등으로 포트폴리오를 확대했으나 2000년대 들어서 인수합병을 통해 중공업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박승직의 혁신과 도전 정신을 이어받은 두산그룹은 100년 기업을 넘어 또 다른 100년을 준비하고 있다. 원전 산업을 중심으로 기계, 로봇, 친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글로벌 리더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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