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로스앤젤레스는 다문화 사회의 표본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사 속에는 이주와 개척, 그리고 전쟁의 역사가 담겨 있다. 심지어 국토 확장을 위해 외국으로부터 땅을 매입했던 건국사도 있다. 이 역사 속에서도 이민의 역사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담론이자, 다문화를 구성하는 근간이기도 하다. 그 이민사와 다문화를 가장 잘 담은 곳이 캘리포니아다. 그 가운데에서도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는 한국인의 이민사를 상징하는 도시들이며, 특히 한인 교포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 로스앤젤레스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로스앤젤레스는 볼거리가 많은 동네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곳이 미국인지 서울시 나성구인지 여행자에게는 혼란스러운 동네이기도 하다. 교포 사회가 확실히 뿌리 내린 코리아타운 거리는 물론이고, 윌셔 등 그 주변 거리에서 한글 간판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한국어 간판은 현지 교포들이나 한국인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코리아타운에나 걸려 있던 한국 문화의 상징이었다. 이제는 코리아타운을 벗어나도 한국어 간판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이제는 '한국어를 배워보시겠습니까?'라는 커다란 언어 학습 어플리케이션의 한국어 광고판이 다운타운 빌딩 위에 버젓이 걸려 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드라마 오징어 게임 두 번째 이야기를 광고하는 포스터가 백 미터 이상 거리의 벽을 도배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 한국 문화가 자리 잡기 이전에는 일본과 중국의 문화가 아시아 문화의 상징이었다. 그전에는 라틴 문화가 로스앤젤레스의 주류 문화였다. 상류 사회까지 대변하지는 않더라도, 멕시코를 위시한 라틴 문화는 로스앤젤레스와 캘리포니아의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상징적인 문화다. 지금도 코리아타운 한국어 간판 사이에는 타코 가게 간판이나 자동차 정비 간판, 그리고 스페인어로 쓰여 있는 교회들과 성당들의 안내문이 거리에 가득하다.

이 다문화 사회의 상징이자 정점은 엘에이 다저스의 홈구장 담벼락 '차베스 라빈'이다. 넓게는 다저 스타디움 남쪽 출입구와 그 앞에 있는 멕시코계 사람들의 거주지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여기에는 다저 스타디움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거주했던 멕시코계 사람들의 소박한 주택가가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다문화 사회가 들어서기 이전부터 원래 그 땅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거주민들 대부분은 생활의 터전을 잃고 강제로 이주해야 했다. 로스앤젤레스라는 다문화 사회의 주류였던 멕시코 문화가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강제로 이주, 분산, 편입되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멕시코계 사람들은 차베스 라빈이라는 이름 속에서 어두웠던 20세기 흑역사를 보기도 한단다.

미국의 기타리스트 겸 영화음악가, 프로듀서, 그리고 제작자였던 라이 쿠더는 부에나 비스타 소시얼 클럽이라는 쿠바 음악의 상징을 주도했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쿠바 음악의 유행을 선도한 직후 2000년대 초반에 발표한 개인 앨범 제목이 '차베스 라빈'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가 공식적으로 밝힌 바에 따르면, 어린 시절 차베스 라빈 지역 주변에서 들었던 멕시코 음악, 그리고 그 멕시코 음악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겨난 그 지역만의 독특한 형식과 감흥을 21세기에 재현해 보고 싶었다고 한다. 음악의 내용물과는 별개로, 음반 표지에는 재개발에 밀려 부서지는 차베스 라빈 지역의 모습이 삽화로 담겨 있다.

이 앨범 표지는 문화권이 다르고 물리적으로 거리가 있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적어도 라이 쿠더의 음악과 이 표지는 멕시코계 사람들이 느꼈을 역사와 정서, 그리고 애환을 담고 있다.

엉겁결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연말연시를 포함해 한 달을 지내고 오면서, 글쓴이의 뇌리에 각인된 것은 사상 최악의 산불만이 아니었다. 야구팬이자 라이 쿠더의 팬으로서 작정하고 찾아간 차베스 라빈은 유독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글쓴이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는다. 어엿하게 로스앤젤레스 또는 캘리포니아라는 다문화 사회의 주류로 편입한 우리의 문화가 오랫동안 공존하길 간절히 빈다.
황우창 팝칼럼니스트 /그래픽 김은옥 기자
황우창 팝칼럼니스트 /그래픽 김은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