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 역사상 최악의 참사… '159명 사망' YTL30호 침몰 [오늘의 역사]
강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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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2 | 05: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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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2월22일 오전 10시40분쯤 경남 통영(당시 충무) 앞바다에서 대한민국 해군 소속 소형 항만 예인정(YTL30호)이 침몰했다.
이 사고로 경남 진해 해군 훈련소 신병 159기 및 이들과 함께 신병 훈련받던 해경 11기 훈련병 총 159명이 차가운 바닷속에서 사망했다. 이들은 가족들과의 면회를 하루 앞두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면회객들은 한순간에 유족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해당 사건은 당시 전시가 아닌 평시 해난 사고 중 세계 해군 사상 가장 큰 인명 손실을 낸 것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기도 했다. 해군 역사상 최악의 수치라는 평가가 나온다.
해군 159기 159명 사망… 운명의 장난?
51년 전 예인정에는 충렬사 참배를 마치고 외항의 본선으로 돌아기 위해 해군 신병 159기와 함께 신병 훈련받던 해경 11기 훈련병 총 316명이 승선했다. 당시 통영 앞바다에는 폭풍주의보가 내려져 있었으며 파고는 2m였다. 사고는 승선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발생했다.모함을 30m가량 앞두고 몰아닥친 파도를 피하기 위해 급선회를 시도한 예인정은 균형을 잃고 전복됐고 결국 5분 만에 침몰했다. 사고를 목격한 인근 민간 어선들은 필사적으로 구조를 시도했다. 매일호 어부들은 10m 길이 나무 발판을 바다로 던졌고 일각에서는 선박 문을 뜯어 구조에 나선 이들도 있었다.
모함과 구명정까지 동원됐으나 316명 중 생존자는 153명에 불과했다. 당시 해군본부는 사망 및 실종자가 모두 159명이라고 발표했다. 해군은 다음 날 오전부터 인양 작업을 진행했고 해저 15m에서 바닥을 위로 한 채 거꾸로 침몰 된 예인정을 인양했다.
수습은 같은 해 3월까지 이어졌고 1명을 제외한 실종자 모두를 인양했다. 사망자는 해군 훈련병 103명·기간병 6명·해경 11기 50명으로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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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초과 및 조작 미숙이 사고 원인?
이 같은 대참사를 유발한 원인으로는 정원 초과와 정장의 조타 미숙·궂은 날씨에도 참배 강행·훈련병들의 전투화 착용 등이 꼽혔다. 해당 예인정의 정확한 승선 가능 정원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형 선박 출입항을 돕거나 바지선 등을 예인하는 작은 선박인 것을 미루어 봤을 때 정원의 2배가 넘는 사람이 승선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또 폭풍주의보 등 궂은 날씨였음에도 충렬사 참배를 강행한 것에 대해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특히 사상자를 늘리는데에는 훈련병들이 승선 당시 신고 있었던 전투화가 큰 몫을 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무거운 전투화가 물에 빠진 훈련병들의 몸이 뜨는 것을 방해했고 헤엄치기 위해 신발을 신속히 벗어야 하는데 목이 길고 끈으로 단단히 동여맨 탓에 이것이 불가능했다는 설명이다.
많은 걸 바꾼 'YTL30호 침몰'… 해군 함정서 '전투화 금지'
정부는 같은 해 2월28일 사고의 책임을 묻기 위해 해군 참모총장과 차장을 경질했다. 아울러 해군교육단장과 신병훈련소장을 직위 해제하고 훈련대대장 등 인솔 책임자 3명을 구속했다. 그러나 교육단장과 신병훈련소장 등 핵심 지휘부는 별다른 처벌 없이 풀려났다. 인솔책임자들 역시 복직 후 만기 전역했다.사망한 159명은 국립묘지에 안장됐으며 군사원호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사건은 봉합됐다. 이후 해군은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수병의 기초 군사훈련 과정에 포함됐던 충렬사 참배가 전면 폐지됐다. 현재는 부사관과 장교 양성 교육과정에만 남아있다. 또 함정에 오르는 해군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전투화 착용이 금지됐다. 대신 함상화를 착용한다.
한국 해군은 사건 24년이 지난 1998년에서야 공식적으로 위령제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후 2004년 '해군 해경 159위 위령탑 건립위원회'가 발족했으며 고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2007년 이순신 공원에 '159위 위령탑'을 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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