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힘들어 한다. 코로나 시기를 견뎌낸 기업들도 지금의 상황이 더 어렵다고 말한다. 실제로 한국은행을 비롯한 국내 기관들과 S&P 등 국제적 기관들은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9%에서 1.5%(한국은행), 1.6%에서 1.2%(S&P)로 하향 조정했다. 건설경기 하락, 가계대출 증가, 연체율 상승, 소비여력 감소 등 복합적인 요인이 겹치고 있지만 정부의 대응수단도 마땅치 않아 보인다. 특히 석유화학업계와 철강업계는 중국의 저가 공세와 각국의 자국 중심 관세정책의 직격탄을 맞아 수출환경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2030NDC(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도 준비해야 한다. 먹고살기도 힘든 상황에서 탄소중립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한 절약과 효율 향상으로는 한계에 다다라 이제는 공정 자체를 변화시켜야 하는 시점이고 이는 곧 본격적으로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시기라는 의미가 된다. 2023년 보스턴컨설팅그룹(BCG)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2050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총 투자 규모는 최대 3조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이미 원가 부담과 경쟁 악화에 시달리는 기업들에게 이러한 막대한 투자는 큰 부담이다.

다른 나라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미국은 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하고 화석연료 사용을 확대하고 있으며, EU마저도 기업 경쟁력 훼손을 우려해 탄소감축 규제를 간소화하는 옴니버스 패키지를 도입했다. 이는 어떤 나라도 자국 기업의 경쟁력을 희생하면서까지 탄소중립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역시 기업의 경쟁력을 해치지 않으면서 탄소중립이라는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 수단이 바로 '금융'이다. 탄소중립을 위한 금융은 크게 두 축으로 나뉜다. 하나는 신재생에너지, 에너지효율, 친환경 교통 등 녹색분류체계에 부합하는 사업에 투자하는 '녹색금융', 다른 하나는 기존 고탄소 산업의 저탄소 전환을 지원하는 '전환금융'이다.

우리나라의 녹색금융은 최근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정부는 2021년부터 'K-택소노미'를 도입해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활동을 정의했고, 이를 토대로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녹색금융을 확대하고 있다. 2024년 11월 기준 국내 녹색채권 누적 발행액은 36조원을 넘어섰고, 민간 기업들도 수소, 재생에너지, 친환경 소재 분야에서 녹색채권을 활용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급성장하는 녹색금융의 수혜는 대부분 친환경 산업에 집중돼 있다. 철강, 시멘트, 석유화학 등 전통 제조업이 저탄소 전환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여전히 충분히 공급되지 않고 있다.

한국은행의 연구에 따르면 탄소감축 초기에 가장 효과가 높은 금융이 전환금융이고 고탄소 산업이 저탄소 산업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핵심 동력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전환금융 규모는 2억9000만달러 수준에 불과하다. 이는 우리나라와 산업구조가 비슷한 일본(268억달러), 중국(63억달러)과 비교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2030년까지 전환금융 수요는 약 1000조원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관련 법제와 정책은 아직 정비되지 않았다. 환경부는 2022년부터 '녹색정책금융활성화사업'을 통해 중소·중견기업의 저탄소 전환을 지원하고 있지만, 대형 제조업 전반을 포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국회에서는 김소희 의원이 '기후금융특별법'을 발의해 철강, 조선, 석유화학, 자동차, 반도체 등 핵심 산업의 전환을 위한 금융지원 체계를 마련하려 하고 있다.

영국은 2023년 '전환 금융 시장 검토' 보고서를 통해 전환금융 제도 구축을 위한 5가지 핵심 권고안을 제시했다. ▲전환금융 분류체계 및 가이드라인 마련 ▲기업의 전환 활동을 지원하는 금융 솔루션을 개발하기 위한 전환금융 연구소 설립 ▲정부-기업 간 협력 및 조정 메커니즘 구축 등이다. 영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투자은행인 바클레이즈(Barclays Plc)는 여기에 더하여 ▲전환금융을 위한 인센티브 제공 ▲전환금융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정책 환경 조성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탄소중립의 길은 일부 친환경 산업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경제 전반, 특히 우리 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고탄소 제조업의 구조적 전환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면서 그 전환을 가능케 하는 힘은 '전환금융'에 있다.

지금이야말로 선언을 넘어 실천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구축할 시점이다.
조영준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원장
조영준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