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치매에 걸린 뒤부터 치매 환자의 10명 중 6명이 겪는다는 '배회' 증상을 보인 탓에 아내 정희씨는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을 빼면 온종일 남편을 따라다니기 바쁘다. 사진은 지난 4일 정수씨와 정희씨가 동네를 산책하는 모습. /사진=김성아 기자


제주의 어느 해안가 마을에선 김정수(가명·84세)씨와 윤정희(가명·80세)씨 두 사람을 모르는 이가 없다. 하루 24시간,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몇 시간씩 동네를 함께 돌아다니는 탓에 마을 주민들은 두 사람을 멀리서도 알아본다. 윤씨는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을 빼면 온종일 김씨를 따라다니기 바쁘다. 은행에 가서 일을 보거나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고 싶어도 김씨를 홀로 두고 나갈 수 없다.


김씨가 치매에 걸린 뒤부터 치매 환자 10명 중 6명이 겪는다는 '배회' 증상을 보이는 탓이다. 김씨는 유독 배회 증상이 심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늦은 밤까지 배회는 계속된다. 어머니가 계신 개낭개 바당(조천읍 조천리에 위치한 조천포 인근)에 가겠다며, 또 시내에 가봐야겠다면서 온종일 동네를 헤맨다. 걸음걸이가 빠른 김씨는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금세 시야에서 사라지기 십상이어서 윤씨는 늘 신경을 곤두세운다.
남편은 집에 있으면서도 "집에 가자"는 말을 반복한다. 사진은 집에서도 배회가 계속되는 탓에 손녀딸이 집 이곳저곳에 '여기가 집'이라고 적어 붙여놓은 모습. /사진=김성아 기자


배회는 집에서도 계속된다. 김씨는 집에 있으면서도 "집에 가자"는 말을 반복한다. 손녀딸이 집 이곳저곳에 '여기가 집'이라고 적어 붙여놓았지만 김씨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해가 지면 배회 증상이 더 심해진다. 시도 때도 없이 현관문에 매달리고 화장실을 찾아 이방 저방을 들락날락하는 걸 쫓아다니다 보니 '통잠'이란 건 사라진 지 오래다.

치매 남편과의 7년… 정희씨가 숨 쉴 수 있는 시간은 단 4시간


정희씨는 하루 2번, 알약 9개를 먹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삼시세끼 밥을 차려내는 것, 때마다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까지 젓가락질 말고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남편을 온종일 돌본다. 사진은 집안 곳곳에 놓인 노부부의 모습이 담긴 사진으로 2002년 김정수씨와 그의 부인이 손녀딸과 찍은 모습. /사진=김성아 기자


김씨는 77살이 되던 해 치매 진단을 받았다. 함께 살던 막내 손녀가 스무살 대학생이 돼 서울로 떠나고 부부는 40년 가까이 일궈온 감귤밭을 정리해 읍내 아파트로 이사한 참이었다. "아이들도 다 자기 길 찾아가고 이제야 좀 둘이 쉬면서 살겠구나 싶었는데…" 윤씨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노부부가 함께한 반백년이 넘은 추억은 집안 곳곳에 놓인 액자마다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치매 이후 김씨의 머릿속에서 기억은 빠르게 지워져 갔다. 아이들 이름과 얼굴을 헷갈리더니 이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낯설어한다. 기억이 뒤죽박죽되면서 온종일 입을 열지 않는 날도 잦아졌다.


치매 증상이 심해지면서 윤씨는 자식들이 사는 서울로 옮겨가려고 했으나 쉽지 않다고 말했다. 평생을 살던 제주를 떠나면 김씨의 증상이 더 악화할까 걱정된다는 것이다. 지역 내 돌봄 시설도 대안이 되지 못했다. 주간보호센터는 배회 증상이 심한 환자가 실종되면 책임 문제가 커질 수 있다며 김씨를 거부했다. 그렇다고 요양원에 보내는 것은 용납이 안 됐다. 손이 많이 가는 환자일수록 수면제를 먹여 잠만 재우려 한다는 얘기를 익히 들어서다.

그나마 요양보호사인 이미순(가명)씨가 찾아오는 하루 4시간 만이 윤씨가 유일하게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이다. 김씨는 장기요양보험 2등급 판정을 받아 하루 4시간, 월 최대 28일 요양보호사가 집으로 찾아오는 '방문요양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가 그 시간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윤씨 홀로 오롯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열악한 돌봄 시스템의 공백은 오롯이 윤씨의 희생으로 채워졌다. 하루 2번, 알약 9개를 먹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삼시세끼 밥을 차려내는 것, 때마다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까지. 젓가락질 말고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김씨를 위해 윤씨는 자기 삶의 대부분을 포기했다. 윤씨는 그래도 이 정도면 착한 치매라며 "의사 선생님이 폭력성을 띠는 분들도 많다고 하더라"고 했다.

치매 환자 100만 시대… '국가책임제'는 뒷걸음질

복지 시스템이 커버하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인 채 치매 가족을 돌보는 사람은 정희씨만이 아니다. 사진은 지난해 9월 서울의 한 공원에서 노인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스1


복지 시스템이 커버하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은 김씨만이 아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올해 기준 국내 치매 환자 수는 전체 노인 인구의 약 9.17%에 달하는 97만명이며 그중 81.4%가 가족에게 돌봄을 받고 있다. 결국 수많은 가정이 윤씨와 같은 짐을 짊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한국이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말 한국이 65세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 이상인 '초고령 사회'에 진입함에 따라 치매 환자도 함께 급증할 것으로 전망된다. 건강관리공단에 따르면 국내 치매 환자는 2039년 200만명, 2050년에는 치매 환자가 300만명을 넘길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2017년 '치매 국가책임제'를 선언하고 조기 검진과 인지 강화 프로그램, 돌봄 서비스 연계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치매안심센터를 전국 256곳에 설립했다. 치매 가족의 경제적 부담도 덜었다. 중증 치매 환자의 의료비 본인부담률을 10% 수준으로 낮췄고 2018년부터는 경증 환자도 장기요양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에서 치매 국가책임제도 제동이 걸렸다. 긴축재정 기조 속에서 치매 관리 체계 구축 관련 예산이 줄어들었고 전국 곳곳에 설치된 치매안심센터의 운영비도 삭감됐다. 관련 연구개발(R&D) 예산까지 줄어들면서 치매 조기 진단 기술 개발 등도 타격을 입었다. 복지 사각지대는 다시 넓어졌다.

초고령사회 대한민국, '돌봄을 함께 짊어지는 사회'가 필요하다

정희씨는 "치매를 비롯한 노인성 질환은 이제 노년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직면할 문제"라며 다음 정부는 '돌봄을 함께 짊어지는 사회'를 만들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오른쪽부터)와 김문수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한덕수 무소속 대통령 선거 예비 후보(왼쪽 세번째)가 지난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열린 불기 2569년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에 참석해 합장하는 모습. /사진=뉴스1


다음 달 3일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된다. 의료 공백과 돌봄 위기가 맞물린 초고령 사회에서 차기 정부가 어떤 복지 체계를 설계할지 국민들의 관심이 쏠린다. 윤씨와 요양보호사 이씨는 "치매를 비롯한 노인성 질환은 이제 노년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직면할 문제"라며 "다음 정부는 '돌봄을 함께 짊어지는 사회'를 만들어주길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치매는 쉽게 낫지 않고 오래 가는 병"이라며 "보호자가 지치지 않도록 받쳐주는 정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치매는 흔히 환자보다도 돌보는 가족이 더 큰 고통을 겪는 병으로 설명된다. 사회적 고립, 육체적 피로, 경제적 부담이 겹겹이 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매와 함께 살아가는 환자 가족을 위한 국가적 지원 체계는 턱없이 부족하다. 전국에 설치된 치매 환자 가족 지원센터는 단 한 곳뿐이며 환자 가족에게 쉼을 보장하는 '장기 요양 가족휴가제'도 제도만 있을 뿐 이용률은 1%에 미치지 못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는다.

치매의 예방과 조기 발견을 위해 차기 정부가 '치매 친화적 사회' 조성에 나서야 한다고도 말했다. 치매를 두고 '노망났다', '벽에 똥칠하는 병' 등으로 비하하는, 치매에 대한 뿌리 깊은 낙인과 혐오가 만연한 사회 분위기는 치매 조기 진단을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치매 환자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내 가족도 언제든 겪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지속 홍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돌봄의 사회화를 위해서는 요양 시설에 덧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도 벗겨 내야 한다고 했다. 사진은 일본 지바현 북서부 우라야스(浦安市)에 위치한 요양원 '긴모쿠세이 우라야스'의 입주자 거주 공간으로 각 방문 옆에는 입주자의 이름을 바느질로 새긴 명패가 붙어 있고 각 방은 원룸(1인실) 형태로 운영된다. /사진=뉴스1


정부가 요양 시설에 덧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를 벗겨 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그는 "한국의 요양원은 죽음을 기다리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요양원이 '연명'을 넘어 노년의 삶을 도와주는 곳이 돼야 보호자들도 믿고 맡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요양 시설의 구조적 변화가 수반돼야 한다고 했다. 요양보호사 한 명이 8~10명의 환자를 돌보는 '돌봄 과중' 속에서, 한 방에 6명씩 생활하며 칸막이라고는 커튼이 전부인 구조에서는 질 높은 돌봄을 기대하기 어렵다. 일본은 1990년대부터 요양시설에 1인실을 도입했고 2003년부터는 아예 법적으로 의무화했다.

이씨는 "한국의 요양시설은 민간에 의존하고 있어 최고급 요양시설이 아니라면 질 낮은 시설을 감수해야 하는 구조"라며 "차기 정부는 중산층도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공공 인프라를 마련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소득 수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요양 모델을 마련하고 전문 인력 확보와 존엄을 지킬 수 있는 공간 설계를 법적으로 의무화해야 한다"며 "그래야 요양원이 노년의 삶을 함께 설계하는 곳이 될 수 있고, 돌봄의 사회화로 나아갈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