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공인중개사무소에 전·월세 안내문이 붙어 있다. / 사진=뉴스1 박지혜 기자


"전에 살던 집에서 나올 때 전세자금 반환문제로 집주인이랑 갈등이 컸어요. 집주인이 '돈이 없다'면서 잠수까지 탔는데 TV에서나 보던 전세사기 피해자가 내가 될 수도 있겠다는 공포감에 마음 고생이 정말 심했죠."


서울에서 자취하는 김용범씨(38·가명)는 지난 겨울만 생각하면 아직도 간담이 서늘하다. 6년 동안 전세로 살던 집에서 나오기 위해 더이상 재연장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돌연 집주인이 "다음 세입자가 구해지지 않으면 돈을 돌려줄 수 없다"고 엄포를 놓으면서 수개월간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

"돈 없어서 전세자금 못돌려줘"

2013년 서울의 한 기업에 입사해 수원에서 출퇴근을 했던 김씨는 이동 시간을 아끼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2018년11월 서울 화곡동의 한 빌라로 이사를 했다. 1999년에 지어진 건물로 엘리베이터도 없고 시설은 다소 낙후됐지만 정남향에다 건물 정면으로 길게 길이 뻗은 덕분에 조망을 가리는 다른 건물이 없어 햇빛이 잘 들었다. 투룸에 거실과 부엌이 따로 구분된 구조임에도 전세금은 1억5000만원으로 당시 주변 빌라들의 시세에 비해 상당히 저렴했다.

김씨는 "당시 집을 소개해줬던 공인중개사도 '좀 오래된 건물이지만 이 가격에 이 만한 집이 없다'고 말해 바로 계약을 했다"며 "직장 생활을 하며 모은 돈에 부모님이 보태주신 돈으로 대출 없이 전세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사 후 만족도는 높았다. 수원에 살때는 하루 4시간이던 출퇴근 시간이 1시간으로 크게 단축됐고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집주인은 재계약 기간이 도래한 2020년과 2022년 외에는 김씨에게 일체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 "자취하는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집주인이 사사건건 간섭을 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있다는데 저는 6년 동안 그런 일이 없었다"며 "'정말 좋은 집주인을 만났구나, 내가 운이 좋구나' 생각을 했다"고 소회했다.

하지만 이 같은 김씨의 생각은 빗나갔다. 전세 재계약 5개월을 앞둔 지난해 6월 김씨는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더 이상 연장을 하지않고 이사를 가겠다는 뜻을 전했다. 집주인은 곧바로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고 이후 집을 보러오는 사람들의 걸음이 이어졌다. 하지만 계약 종료를 한 달 앞둔 10월이 돼도록 다음 세입자의 계약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김씨는 "공인중개사에 물어보니 '엘리베이터도 없고 시설이 노후한 탓에 사람들이 계약을 꺼린다'고 했다"며 "집주인이 도배나 장판 교체 등을 약속해주면 아마 계약자가 나올 것이라고 귀띔해줘서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집주인은 "돈이 없어 안 된다"고 거절했다. 불안해진 김씨가 "세입자가 안 구해지더라도 계약기간이 종료되는 11월에 전세자금은 돌려주실 수 있냐"고 물었으나 집주인은 "세입자가 안 구해지면 못준다"고 답변했다. 김씨가 항의하자 집주인은 "돈이 없는 걸 어떻게 하냐. 어려서 잘 모르나본데 원래 그런 거다"라며 되레 김씨를 나무랐다고 한다. "대출을 받아서라도 돌려줘야하는 게 아니냐"고 항변하자 집주인은 "다음 세입자가 구해지면 줄 수 있는 돈을 내가 왜 대출까지 받아서 줘야하냐"며 전화를 끊었다.


서울 남산타워에서 바라본 시내 빌라 밀집지역 모습. / 사진=뉴시스 홍효식 /사진=홍효식


정당한 반환도 거절… 연락마저 안 받아

김씨는 초조해졌다. 전세보증보험도 가입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보증보험 가입을 알아봤지만 또다른 문제가 드러났다. 건축물 대장 도면에 나와 있는 집 호수와 실제 사는 집 호수가 옆집과 뒤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이다. 현행법상 건축물 대장과 호수가 다르면 전세자금 반환 등의 문제가 생겼을 때 법적인 보장을 받을 수 없다. 한마디로 김씨는 법적으로 계약한 집과 다른 집에 살고 있는 셈이어서 집주인이 돈을 돌려주지 않으면 구제 받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사방으로 알아본 결과 옆집과 면적과 구조가 동일할 경우 각 집의 주인끼리 협의해 관할 구청에 정정신고를 하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집주인의 비협조가 문제였다. 옆집에도 이사실을 알리고 김씨의 집주인에게도 연락을 했지만 집주인은 "왜 이렇게 연락을 많이하냐"며 전화를 안받거나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다행히 옆집 세대주가 직접 집주인과 대화에 나서면서 건축물 대장 도면 정정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다.

이 문제를 바로잡는 사이 계약 종료기간이 지났고 세입자는 여전히 구해지지 않았다. 이후로도 집주인에게 전세자금을 돌려달라고 문자와 전화, 카톡을 보냈으나 집주인은 아예 전원을 꺼버린 채 잠수를 탔다. 내용증명도 보냈지만 수취인 부재를 이유로 송달이 되지 않았다. 최후의 수단으로 공시송달을하고 전세자금 반환 소송을 진행할까 했으나 돈을 돌려받기까지 얼마나 오랜 기간이 걸릴지도 몰랐기 때문에 선뜻 소송을 제기하기도 어려웠다.

김씨는 "처음엔 내용증명을 보내는 등 뭔가 법적인 조치를 취하려는 모습을 보이면 집주인이 알아서 겁을 먹고 돈을 돌려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순진하고 멍청한 생각이었다"며 "분명 내 권리를 보호할 법적인 제도가 있기는 한데 당사자 입장에서는 이 제도가 너무 실효성이 떨어지고 허술하다고 느꼈다"고 토로했다.

결국 세입자가 구해지지 않은채 해가 바뀌었다. 기존 두 번의 재계약에서 1000만원씩 증액한 것을 포함해 김씨가 집주인에게 묶인 전세자금은 총 1억7000만원. 김씨는 "1억7000만원을 대체 언제 돌려받을 수 있나라는 생각에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며 "잠도 제대로 못자고 밥도 못 먹어서 두 달 만에 살이 7kg 넘게 빠졌다"고 했다.

답답했던 김씨는 최초 집 계약을 중개해줬던 부동산에게 이 상황을 털어놨다. 김씨는 "이야기를 듣던 공인중개사가 '내가 집 주인과 안면이 좀 있는데 일부러 돈을 떼어먹거나 그럴 만한 사람은 아니니 직접 대화해보겠다'고 말했다"며 "내 연락은 안 받던 집주인이 공인중개사의 연락은 받았고 며칠 간의 설득끝에 도배와 장판, 노후 싱크대 교체를 약속했다"고 전했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 대책위 회원들이 인천지방검찰청 앞에서 사기, 부동산실명법 위반, 공인중개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돼 2심에서 감형을 받은 건축업자 A씨와 공모자들에 대한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사진=뉴시스 김동영 기자


돈 돌려 받았지만 상처 커… "엄벌 필요"

이후로는 일이 잘 풀렸다. 집주인이 집안 수리를 확약하자 계약을 하겠다는 다음 세입자가 나타났고 결국 올해 4월 최종 계약이 이뤄져 전세금을 돌려받고 이사를 나올 수 있었다. 당초 계약 종료일로부터 5개월이 지난 시점의 일이다.

돈은 돌려받았지만 김씨의 마음은 편치않다. 그는 "뉴스를 보면 전세사기 이런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나오는데 솔직히 남일 같지가 않다"며 "다행히 제 경우는 전세사기까진 아니었지만 '배째라' 식으로 나오는 집주인의 태도 앞에 임차인이 효과적이고 즉각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마땅한 수단이 사실상 없었다"고 토로했다.

이어 "돈을 돌려받기까지 하도 마음 고생을 많이해서 이번 집을 구할때는 전세보증보험이 되는지부터 알아보고 곧바로 보험에 가입도 했다"고 덧붙였다.

김씨의 친구 부부도 같은 문제를 겪었다고 한다. 그는 "제 친구 부부는 심지어 집주인이 매출 수십억원 규모의 회사를 운영하고 서울과 분당에 고급 아파트를 보유한 자산가임에도 전세계약 종료 후 돈을 돌려받기까지 반년이 넘게 걸렸다"며 "친구 부부도 대응 수단을 알아봤지만 돈이 있고 법을 잘 아는 집주인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렸다. 결국엔 돈을 돌려받긴 했지만 그마저도 벽지가 더러워졌다는 등 생트집을 잡아 일부를 제했다고 한다"고 했다.

김씨는 다음 대통령이 전세나 월세 등 거주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서민들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구제조치를 마련하고 악덕 집주인과 사기꾼을 엄벌할 수 있도록 처벌기준을 높여야한다고 밝혔다.

그는 "수백억원 규모의 전세사기를 쳐 서민에게 '경제적 살인'을 저지른 악덕 사기꾼들이 몇년 안되는 형을 살거나 상고 과정에서 이마저도감형이 되는데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분통이 터진다"며 "살인 등 흉악범죄에 준하는 수준으로 강력하게 처벌해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다음 대통령은 제발 서민들이 주거 불안에 대한 고민 없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만한 환경을 조성해주기 바란다"며 "내 집 마련이 어려운 시대에 남의 집 살이도 서러운데 제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도록 다음 대통령이 강력한 조치를 취해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