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위기 교훈은 시장에 자율조정기능이 없다는 것이다. (시장은) 적절한 규제를 하지 않으면 항상 선을 넘어선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가 2008년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와 관련해 한 말이다.


금융은 대표 규제산업이다. 어느 정부든 전봇대 등 자극적인 말로 금융규제 완화를 내걸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기득권의 반발 때문이었을까? 소리만 요란할 뿐 매번 대못을 뽑지 못했다. 새 정부도 규제혁파 카드를 꺼내들었다. 업계에서도 기대감이 커진다.

벤처시장 큰손 은행계 금융지주 벤처투자 규제 완화가 대표적이다. 금융당국에선 업계 요구에 KB 신한 하나 우리 NH농협금융 등의 규제 완화 방안 카드를 만지작 거린다. 새 정부 정책에 역행하는 엇박자 규제가 투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게 업계 불만이다.


핵심계열사인 은행과 증권, 보험사 등을 거느린 금융지주(은행)는 보통주자본비율(CET1) 규제가 걸림돌이다. 이 비율은 손실 흡수 보통주자본을 RWA(위험가중자산)로 나눠 산정된다. 그런데 RWA 가중치가 벤처기업 투자 시 리스크에 따라 최대 400%가 반영된다. 벤처기업 투자를 늘릴수록 건전성이 악화되는 구조다.

건전성 규제에 핀테크 등 벤처기업의 출자 제한이 확대돼도 투자를 늘리기 쉽지 않다는 얘기도 들린다. 금융위원회는 올해 금융지주의 핀테크 출자 제한을 기존 5%에서 15%로 확대하는 법 개정을 추진한다. 대형 증권사도 예외는 아니다. 은행 지주 계열 증권사 중 자기자본 4조원 이상 초대형 IB(투자은행)들도 벤처기업 투자 시 모회사의 건전성 악화를 우려한다.


지난해 기준 민간 금융사(국책은행인 산업은행 제외)는 벤처펀드 출자금액이 민간과 정책금융을 합친 전체의 30%에 육박한다. 민간의 일반법인(기업)은 물론 VC(벤처캐피탈), 각종 연기금, 외국인 등을 압도할 정도로 큰 손이다. 모태펀드와 성장금융, 산업은행 등 정책금융 출자금액을 다 합친 거 보다 많다. 2022년부터 금융사들이 출자를 줄여 한 푼이 아쉬운 혁신기업의 자금줄은 더 말라가고 있다.

완화 신중론도 있다. 규제철폐에 따른 금융시스템 훼손과 신용위기, 소비와 투자 등 경제악화 치명상을 우려한다. 정책실기가 가져올 파장이 너무 크다는 얘기다. 실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주범으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신용파생상품 CDS(신용부도스왑) 규제 완화가 꼽힌다.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 불렸던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금융위기 전 CDS를 옹호하기도 했다.


중재안도 있다. 탄탄한 안전장치 마련을 전제로 한 규제개혁이다. 윤석헌 전 금융감독원장은 "규제 완화는 필요하지만 적절한 감독기능 강화가 전제돼야 한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

절대 재발해선 안되는 금융 재앙을 사전에 차단하는 규제는 필요하다. 그러면서 시대적 요구인 혁신과 변화를 가로막는 불합리한 규제 역시 철폐해야 한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여전히 우리만의 세상에 살 필요는 없다. 이해득실에 찬반 논쟁은 팽팽하다. 그만큼 적절한 규제는 말처럼 쉽지 않다.

이재명 대통령은 AI(인공지능) 투자 100조원, 연간 벤처투자 40조원 등 친벤처 공약을 내걸었다. 취임 일성으론 네거티브 중심의 규제를 천명했다. "통제하고 관리하는 정부가 아니라 지원하는 정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총성없는 글로벌 AI 디지털 패권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고 올해 0%대 저성장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해법이다.

규제를 풀고 혁신기업에 대규모 재원을 쏟아부어 민간 투자를 유도하는 새정부 정책의 총론은 맞다. 다만 알맹이 없는 구호 뿐이다. 규제개혁 세부 방향과 대상·일정, 재원 마련 등 각론은 부족하다. 다시 쉽지 않은 규제완화만 부르짖는 걸 5년 동안 지켜봐야 하는 건 아닌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송정훈 머니S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