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19일 제28보병사단 530GP에서 복무 중인 김동민 일병이 내무반에서 자고 있는 전우들을 향해 총기 난사를 벌였다. 사진은 2012년 6월19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연천530GP피격사건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국민대회를 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2005년 6월19일 오전 2시30분쯤 경기 연천군 중면 삼곶리 비무장지대(DMZ) 육군 제28보병사단 530GP 내무반에서 폭발음과 함께 총성이 울려 퍼졌다.


피의자는 김동민 일병이었다. 김 일병은 야간 근무 도중 25명이 자고 있던 내무반으로 돌아와 수류탄 1발을 던진 후 상황실로 향했고 체력단련장에서 김종명 중위를 살해했다. 다시 내무실로 돌아온 김 일병은 내무실을 향해 K1 기관 단총 44발을 난사해 전우들을 살해했다. 총기 난사 후 김 일병은 초소로 돌아가 태연히 근무를 서다 붙잡혔고 범행을 자백했다.

이 사건으로 GP장이었던 김 중위를 비롯해 전영철·조정웅·박의원·이태련·차유철·김인창·이건욱 상병이 사망했다.

김 일병은 왜 총을 들었을까?

2005년 6월19일 제28보병사단 530GP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을 두고 유족들이 재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사진은 2014년 6월1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연천 530GP 총기난사 사건'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에서 희생자 유가족의 모습. /사진=뉴스1


김 일병은 이에 앞서 같은해 1월 28사단 내 다른 GP에서 가혹행위와 구타를 당한 후 전입해 온 병사였다. 군 당국은 "내성적인 성격의 김 일병이 선임들의 괴롭힘에 시달리다 범행을 저질렀다"고 발표했다.


다만 김 일병은 진술서를 통해 심각한 폭력은 없었고 자신에게 잘해줬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밝히면서 '괴롭힘에 시달리다 범행을 저질렀다'는 군 당국의 발표에 의문을 가진 이들도 나타났다.

군 당국의 발표 번복도 의심을 키웠다. 군 당국은 처음 발표 당시 김 일병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으나 이내 한 달 전부터 범행을 계획했다고 주장해 의심을 키웠다.


2005년 11월23일 육군 제3야전군 보통군사법원은 상관살해죄, 상관살해미수죄, 초병살해미수죄, 살인죄 등으로 기소된 김 일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항소심과 대법원 판단을 거친 김 일병은 약 4년 동안 이어진 재판 끝에 사형을 확정받았다.

유족들은 수사에 강한 불신을 품었고 김 일병이 범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주장을 했다. 이들은 북한군이 병사들을 사살했으며 군이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해당 주장의 근거로 당시 김 일병이 사용한 총과 수류탄 안전핀에 지문이 검출되지 않은 점, 김 일병이 재판 도중 갑자기 "재판관님 왜 직접 증거도 목격자도 없는데 저라고 확신하시죠"라고 돌발 질문을 한 점, 수류탄이 터진 내무반의 피해가 거의 없는 점 등을 지적했고 당국과 갈등을 벌였다.


유족들의 계속된 재수사 요구에 결국 사건 발생 12년 만인 2017년 재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김 일병이 범행을 재차 인정하면서 북한의 소행이라는 주장은 사실무근으로 끝났다.

병영문화혁신 운동… 반복되는 군대 부조리

2005년 6월19일 제28보병사단 530GP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 이후 대대적인 병영문화혁신 운동에 나섰으나 유사한 사고가 반복됐다. 사진은 2014년 8월12일 윤승주 일병이 사망한 제28보병사단에 붙어있는 언어폭력근절 안내문의 모습. /사진=뉴스1(사진공동취재단)


대한민국 군은 김 일병 사건 이후 대대적인 병영문화혁신 운동에 나섰다. 모든 부대에 걸쳐 부대 조사와 소원 수리가 행해졌으며 육군 내 구타와 갈굼, 가혹행위, 기수열외, 내무 부조리 등 병영 악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병영문화 개선 대책과 장병 기본권 증진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정부는 병영문화 개선위원회를 만들고 군대 내 기본권 확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이후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다.

결국 사건 발생 9년 후인 2014년 4월6일 제28보병사단에선 병영 부조리로 윤승주 일병이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이어졌다. 또 그해 6월12일 제22보병사단 제55연대 GOP에서 임도빈 병장이 총기 난사를 벌인 사건도 발생했다.

당시 한 시민은 "참으면 윤 일병, 못 참으면 임 병장 되는 현실에서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군대에 보내겠나"라고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