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화학산업 위기에 정유사와의 수직계열화를 통해 원료 조달과 설비 최적화를 한꺼번에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진=챗GPT


글로벌 공급과잉과 시황 악화로 국내 석유화학업계의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정유사와의 수직계열화를 통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산업 재편이 현실화되려면 정부의 규제 완화와 적극적인 정책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는 요구도 커지고 있다.


4일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따르면 동북아 지역의 납사크래커 가동률은 2020년 100%에서 2024년 81%까지 하락했다. 중국의 증설로 2028년에는 76%까지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석화사들은 공급과잉과 수요 둔화가 지속되면서 최소한의 가동률 기준을 맞추기 어려운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공정의 특성상 최소 85% 이상의 가동률이 유지돼야 원가 효율을 보장할 수 있다고 본다.


정유사와 석유화학기업 간 통합으로 돌파구를 찾자는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HD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 대산단지 석유화학 설비 통합설이 시장에서 다시 부각된 게 대표적이다.

석유화학업계의 원가 구조를 감안하면 수직계열화 외에 현실적 대안이 마땅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납사 등 원재료가 전체 제조비용의 80%를 차지하는 업스트림 제품의 특성상, 원료 가격 협상력이 취약한 구조로는 글로벌 경쟁에서 생존이 어렵다는 이유다.


중국은 수직계열화를 통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했다. 중국은 국영 정유·석유화학 대기업을 중심으로 원유를 직접 도입해 정유부터 석유화학까지 한 공장에서 통합적으로 처리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정유공정에서 납사를 직접 생산해 외부에서 추가로 구매할 필요 없이 자급하고, 이를 기반으로 에틸렌·프로필렌 등 기초 유분을 제조해 다시 최종 석유화학제품까지 내수 중심으로 공급한다. 중간 원료의 조달 리스크를 줄이고 가격 협상력도 키워서 글로벌 시장에서 보다 안정적인 원가 경쟁력을 갖췄다.

수직계열화 모델은 원가 효율, 수급 안정화 외에도 운영 효율성 개선 효과가 있다. 정유와 석유화학을 하나의 공정으로 묶어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과 열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재활용할 수 있다. 글로벌 석유화학 시장이 경기 변동성과 에너지 가격에 매우 민감하다는 특성을 고려하면 통합형 설비는 기업의 리스크 대응력을 높일 수 있다.


정유사와 석유화학업체가 별도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은 국내 석유화학사들은 납사 등 원료를 외부에서 조달해야 했다. 국내 정유사에서 생산한 납사를 구매하거나 수입해 왔다. 이 때문에 원료 가격 협상력과 가격 방어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상민 LG화학 석유화학본부장은 전날 국회미래산업포럼에서 "수평적 통합만으로는 원가의 80%를 차지하는 납사 경쟁력 개선이 미미하고 일부 설비 합리화 효과가 있더라도 업스트림의 고정비 비중(약 10%)을 고려할 때 절감 효과는 제한적"이라며 "오히려 단순한 수평 통합은 적자 구조를 탈피하기 어렵게 만들거나 규모만 키우는 결과에 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유사와의 협력은 납사 경쟁력과 설비 합리화를 동시에 추진해 원가를 5% 이상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정유사와 경쟁력 있는 석화사 간의 우선적 통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다만 이런 통합 전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규제 장벽을 낮추는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 현재 공정거래법과 기업결합 심사 기준으로는 동일 업종, 인접 업종 기업의 통합 논의가 담합이나 시장지배력 강화로 간주돼 추진이 쉽지 않다.

엄찬왕 한국화학산업협회 부회장은 "공정거래법이 판단하는 사후적인 법체계이기 때문에 설비과잉 해소를 위해 논의했을 때 이것이 담합으로 간주될 우려가 있다"며 "사업재편 계획에 대해서는 범위를 정해서 산업부와 공정위가 논의를 통해서 가이드라인을 주고 그 범위 내에서 충분히 논의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