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모닝커피다
가끔 과거의 결정을 곱씹는다. 뒤집기도 한다.
"이건 좀 아닌 것 같네"라며 반려했던 제안서나, "이 사람은 우리 회사와 안 맞는 것 같은데"라고 밀어뒀던 이력서 같은 것들. 며칠 뒤 다시 마주하면 "내가 왜 이 걸 못 봤지?" 하며 머리를 긁적일 때가 있다.


그 사이 문서가 달라진 것도, 내가 철학자가 된 것도 아니다. 바뀐 건 그날의 기분, 수면의 질, 아침에 마신 커피 한두 잔, 그것도 아니면 공복혈당 수치일 거다. (의학계는 혈당과 판단의 상관관계를 충분히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일들에도 우리는 자신을 합리적이고 일관된 존재라고 생각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지 않다고.


오류에도 계급이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은 '노이즈(Noise)'에서 그 믿음을 깬다. 심지어 오류에도 계급이 있음을 보여준다.

총오류는 편향(Bias)과 소음(Noise)으로 구성된다. 편향은 과녁 한쪽에 몰려 박히는 총알처럼 예측 가능한 오류다. 반면 소음 혹은 잡음은 총알이 이리저리 흩어져버리는 무작위적 변동성이다. 편향은 적어도 패턴이 있다. 소음에는 없다. 그래서 더 치명적이다.


같은 문서를 두고도 어제의 나는 반대, 오늘의 나는 찬성을 외친다. 어제의 판사는 아침을 건너뛴 엄벌주의자, 오늘의 판사는 점심 배불리 먹고 난 뒤라 온정주의자가 된다. (범죄자에게는 판사의 식사 시간이 최대 변수라는 연구도 있다. 세상은 생각보다 밥심으로 굴러가는 것인가.)

알베르 카뮈의 '전락(La Chute)'은 이 문제를 도덕적 차원으로 풀어낸다.
주인공 클라망스는 정의로운 변호사로 칭송받았다. 그는 스스로의 판단이 공정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강에 몸을 던지는 여성을 목격하고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이 작은 침묵이 그의 세계를 뒤흔든다. 그는 결국 자신이 위선자였음을 고백한다. 끝내 무너진다.


사실 우리도 매일 비슷한 침묵을 반복한다. 다만 기록되지 않을 뿐이다.

클라망스의 추락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편향의 드라마 같다. 자신이 '옳다'는 착각, 그 무지가 만든 오만이 버무려진, 막장 드라마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비록 그가 고백했다고는 하나, 그 판단조차도 여전히 날씨와 기분에 흔들렸을 것이다. 게다가 고백으로 드러났을지언정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소음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된다.

테이블 배치가 달라지면
다른 이야기를 보태볼까 한다. 상대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밀고 당기는, 협상에 대한 것이다.

협상학의 대가 하워드 라이파와 로저 피셔는 환경을 어떻게 세팅하느냐가 결과를 바꾼다고 설명한다. 협상은 일견 논리와 의지의 힘겨루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테이블을 어떻게 차리느냐의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거다.

와인잔이 올라간 자리에서 오가는 말과, 종이컵 커피가 놓인 자리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다를 수 있다. 같은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두고도, 어제는 평행선, 오늘은 극적인 타결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차이는 대개 협상 테이블, 협상장소의 분위기가 만든다. (은행원 시절,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도 굳이 고객을 찾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배웠다. 영업은 날씨가 전부라고 했던 것도 기억에 있다.)

이 대목이 카너먼의 소음 개념과 기묘하게 포개진다.
협상도 결국 소음의 바다 위에서 출렁인다. 판사가 점심 메뉴에 흔들리듯, 협상가는 조명, 의자 배치, 심지어 첫 발언자의 목소리 톤에 흔들린다. 그러니 협상이란 이성의 게임이 아니라, 소음을 줄이고 환경을 조율하는 무대 연출에 가깝다고 할 수밖에.

더 나은 판단은 겸손에서 나온다
현대인의 전락은 한 번의 위선적 침묵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의 무수한 소음이 쌓여 이루어진다.

채용 면접, 인사 평가, 신제품 출시, 법정 판결까지. 우리는 모두 명확한 기준이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직전의 커피 한 잔, 회의실 온도, 심지어 전날 야구 경기 결과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키를 잡는 항해다.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다음 질문으로 수렴한다.
"우리는 왜 늘 우리의 판단이 옳다고 확신하는가?"
그리고 그 답-완벽한 판단은 없다는 것-은 나와 있다. 이미 알고 있다.

소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조금 더 겸손해진다. 그 겸손이야말로 더 나은 판단의 출발점일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결론에 앞서 다시 묻기를.
그때 내린 당신의 결정은 정말로 옳았는가.
아니면 단지 운이 좋았던 것인가.
그 판단은 편향이었나, 소음이었나.
애초에 테이블이 잘못 차려진 건 아니었나.

아니, 더 근본적으로는 그 자리에 앉을 필요조차 없었던 건 아닌가.
김영태 아케이드 프로젝트 대표




김영태
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