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의 경영 활동 전반을 제약했던 불확실성이 사라지면서 이제는 조직 쇄신과 반도체 사업의 '근원적 경쟁력' 회복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사진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3월28일 오후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SCBAC)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회동 등 방중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스1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취임 3주년을 맞았다. 10년 가까이 이어졌던 사법 리스크에서 완전히 벗어나며 '경영 정상화'의 원년을 연 올해, 삼성전자는 반도체 실적 회복세를 보이며 이 회장이 주창한 '뉴 삼성' 비전에 속도를 내고 있다. 취임 3주년을 맞은 이날 삼성전자 주가는 사상 처음으로 10만원을 돌파해 상징적인 분기점을 맞았다.


27일 재계에 따르면 이 회장은 취임 3주년인 이날 별도 기념행사 없이 통상적인 경영 일정을 소화했다. 대내·외 행보보다 성과를 통해 리더십을 증명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2022년 회장에 오른 당시에도 그는 취임사를 생략하고 곧바로 업무에 돌입한 바 있다.

이날 삼성전자 주가는 장중 10만원을 돌파했다. 2018년 액면분할 이후 단 한 번도 넘지 못했던 '10만원의 벽'을 마침내 넘어선 것이다. 반도체 '슈퍼사이클' 재현에 대한 기대감에 더해 최근 잇따른 대규모 수주와 자사주 매입 등 주가 부양 요인이 맞물리면서 상승세를 이끌었다.


이 회장은 지난 7월, 10년 넘게 이어진 사법 리스크를 완전히 털어냈다. 삼성그룹의 경영 활동 전반을 제약했던 불확실성이 사라지면서 이제는 조직 쇄신과 반도체 사업의 '근원적 경쟁력' 회복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

이 회장이 당면한 핵심 과제는 단연 반도체 경쟁력 복원이다. 오랜 기간 이어진 사법 리스크로 이 회장의 경영 행보가 제약을 받는 동안 삼성은 '잃어버린 10년'을 보냈다는 지적이 많다. 그룹의 핵심 축인 반도체 사업이 흔들리기 시작한 시기 역시 이 시기와 맞물린다.


삼성전자는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의 핵심으로 꼽히는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 시기를 놓치면서 'AI 특수'의 수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지난 1분기(1~3월)에는 HBM을 앞세운 SK하이닉스에 33년 동안 유지해 온 '글로벌 D램 1위' 자리를 내주기도 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은 지난 3분기(7~9월)를 기점으로 확연한 '반등 모멘텀'을 잡았다. 삼성전자는 3분기 연결기준 매출 86조원, 영업이익 12조1000억원의 잠정실적을 발표했는데 특히 반도체 사업 부문에서만 5조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거둔 것으로 추산된다.


전체 실적을 끌어내리던 반도체 위탁 생산(파운드리) 사업의 적자 폭도 1조원 아래로 떨어지며 뚜렷한 회복세를 보였다. 이재용 회장이 지난 3월 임원 세미나에서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주문한 이후 약 7개월 만에 나타난 가시적인 결과다.

'협력과 실행'을 앞세운 글로벌 네트워크 경영

이 회장은 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인수합병(M&A) 행보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만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모습. /사진=사와스시 페이스북 캡처


주가 및 실적 반등의 비결은 이재용 회장이 글로벌 네트워크와의 연합을 강화하며 AI 전환기에 맞춘 실용적인 성장 전략을 구축한 데 있다.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환경 속에서 이 회장은 독자 기술 경쟁 대신 협력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삼성의 영향력을 재정립하려는 구상을 펼쳐왔다.

이 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크 강화는 성과로 이어졌다. 삼성전자는 협력 전략을 통해 테슬라, 애플 등으로부터 대규모 파운드리 계약을 연이어 수주했다. 지난 7월 말에는 23조원 규모의 테슬라 파운드리 계약이 체결됐는데 당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삼성 회장과 화상 회의를 했다"고 언급해 주목받았다.

이 회장은 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인수합병(M&A) 행보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지난 5월에는 미국 마시모(Masimo)의 오디오 사업부를 인수해 하만의 전장사업을 강화했고 독일 플랙트그룹(FläktGroup)을 인수해 AI 데이터센터용 공조 시장 대응력을 높였다. 7월에는 미국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 젤스(Xealth)를 인수하며 커넥티드 케어 서비스 시장 진출도 준비 중이다.

조직 문화 쇄신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사법 리스크 해소 이후 '자신만의 리더십'을 구축하기 위한 행보다. 올해 3월 삼성 계열사 임원 2000여명에게 "위기에 강하고 역전에 능하며 승부에 독한 삼성인"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크리스털 패를 전달한 게 대표적인 예시다.

지난 14일에는 주가 상승폭에 따라 직원에게 최대 1억원 상당의 자사주를 지급하는 성과연동형 보상(PSU) 제도를 도입했다. '성과로 인정받는 삼성'을 지향하는 이 회장의 경영 철학이 반영된 조치로 풀이된다.

사진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1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글로벌 AI 핵심 인프라 구축을 위한 상호 협력 LOI(의향서) 체결식에서 샘 올트먼 오픈AI CEO와 악수하고 있는 모습. /사진=삼성전자 제공


이 회장은 오는 28일부터 경북 경주에서 열리는 '2025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CEO 서밋'에 참석한다. 이번 행사에는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등 글로벌 AI·테크 기업 수장들이 대거 참석할 예정으로 이 회장이 글로벌 네트워킹 행보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엔비디아는 AI 반도체 시장 점유율 90% 이상을 차지하는 '절대 강자'로 삼성전자가 생산하는 HBM의 최대 수요처이기도 하다. 지난달 방한한 샘 올트먼 오픈AI CEO가 이 회장과 회동한 직후 삼성전자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 참여가 공식화된 만큼 이번 서밋에서도 구체적인 AI 협력 방안이 발표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내년은 엔비디아 주도로 HBM4 시장이 본격 개화하는 시점이다. 삼성전자는 HBM3·HBM3E에서의 점유율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업계 최초로 1c(10나노급 6세대) D램 공정을 HBM4에 적용, 시장 반등을 노리고 있다.

APEC 일정이 마무리되면 삼성전자의 연말 정기 인사가 이어질 전망이다. 삼성은 통상 12월 초 사장단·임원 인사와 조직 개편을 단행했지만 최근 2년 동안은 11월 말로 일정을 앞당겼다.

이 회장이 올해 3월 "국적과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특급 인재를 선발하겠다"고 밝힌 만큼 과감한 세대교체 인사가 이뤄질 가능성도 거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