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왼쪽), 안와르 알 히즈아지 S-OIL 대표이사. /사진=뉴스1·S-OIL 제공


정부가 다음달 말까지 국내 석유화학 기업에 요구한 에틸렌 감축안을 S-OIL이 따르지 않으면서 사실상 무산 위기에 놓였다. 지난 8월 국내 NCC(나프타 분해설비) 공급 과잉으로 석화업계가 어려움에 빠지자 정부는 270만~370만 톤 감산을 지시했다. 중국발 저가 공세로 NCC 가동률이 손익분기점 아래로 떨어지자 공급을 줄여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취지다. S-OIL은 내년 6월 가동되는 샤힌 프로젝트는 감산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26일 재계에 따르면 S-OIL은 산업통상부와 샤힌 프로젝트 감산 대상 여부를 두고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다. 산업통상부 관계자는 "감산량을 정할 때 국내 NCC 생산 능력을 1470만 톤으로 추산했는데 샤힌 가동 시 생산되는 에틸렌 180만 톤이 포함된 것"이라며 "샤힌만 제외하고 감산하면 내년에도 공급 과잉이 반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S-OIL은 정부의 방향은 고부가 석화제품 전환이지 공급량 감소 자체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석화업계도 S-OIL이 정부 요구에 따르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달 S-OIL이 언론에 샤힌 프로젝트를 공개한 것은 사실상 가동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며 정부가 석화업계 전반을 살리기 위해 요구한 조치를 무시할 경우 '제2의 요소수' 사태가 재발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2021년 발발한 요소수 사태는 국내 생산 이윤이 낮아 중국 수입에 의존했으나 외교적 갈등으로 공급이 중단되며 산업 기반이 흔들린 사건이다.


S-OIL이 사실상 한국 기업이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기업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S-OIL의 지분 63%를 보유한 최대주주 아람코 오버시 컴퍼니 B.V.는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 자회사다. 에틸렌 산업은 진입 장벽이 높아 한 번 생산을 중단하면 관련 산업 생태계가 고착화된다. 정부 요구에 S-OIL을 제외한 국내 기업만 감산에 나서면 관련 구조조정으로 발생한 수혜를 S-OIL이 독차지할 수 있다. 샤힌은 사우디의 TC2C 기술과 저렴한 원유 공급을 기반으로 낮은 가격의 에틸렌 생산이 가능하다. 국내 석유화학 산업 패권이 사실상 사우디로 넘어갈 수 있다.

요소수와 달리 에틸렌이 사우디의 외교적 무기로 활용될 경우 국내 산업에 미칠 영향은 더욱 크다. 에틸렌은 '산업의 쌀'로 불리며 플라스틱·고무·생활용품·반도체 등 대부분의 산업에 쓰인다. 또다른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정한 감산량도 사실은 적은 수준이며 공급 과잉 해소를 위해서는 더 줄여야 한다"며 "이 상황에서 S-OIL은 중국발 저가 공세로 이미 어려운 석화기업에 추가 부담을 주고 있다"고 했다. 현재 70%대 가동률로 공장을 돌릴수록 손해가 나는 상황에서 샤힌 물량까지 더해지면 적자가 큰 기업들은 에틸렌 산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말레이시아 '라피드 프로젝트'와 닮은꼴

말레시아 국영 석유 기업과 아람코가 합작한 '라피드 프로젝트' 현장. /사진=패트로나스 홈페이지 캡처


아람코가 샤힌 프로젝트처럼 해외 기업에 대규모 자금을 투자해 에너지 패권을 확보하려 한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4년 아람코는 말레이시아 국영 석유·가스 회사 페트로나스와 합작해 '라피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계약 조건에는 사우디 원유 70%를 저렴하게 공급하는 조항도 포함됐다. 해당 시설은 하루 30만 배럴 정유와 연 770만 톤 석유화학 제품 생산이 가능하다.


2019년 시운전 후 상업 가동에 들어간 라피드 프로젝트는 동남아시아 일대 공급 과잉을 촉발했다. 값싼 사우디 원유로 막대한 석화제품이 생산되자 인근 국가 석화 기업들은 가격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태국 국영 석유기업 PTT는 결국 아람코와 협력을 확대했고 동남아 에너지 패권은 아람코에 넘어갔다.

한국의 샤힌 프로젝트 역시 '제2의 라피드 프로젝트'로 이어져 에너지 패권을 빼앗기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S-OIL은 사우디에서 원유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정유·석유 회사로 국내 기업 대비 상대적 우위를 갖는다. 샤힌이 생산하는 에틸렌 180만 톤은 국내 NCC 생산 능력의 10%에 해당하며 가격 경쟁력까지 갖추게 되면 경쟁력이 약한 석화 기업은 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아람코의 이 같은 전략을 국제사회에선 '좀비 전략'으로 부른다. 재생에너지 전환 기조와 반대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해외 투자를 확대하고 세계에서 가장 낮은 비용으로 석유를 생산·공급해 경쟁사를 시장에서 밀어내서다. 공급 과잉으로 수익성이 떨어져도 석유 판매 수익으로 공백을 메울 수 있어 일반 석화 기업들은 아람코와 경쟁 자체가 불가능하다.